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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품하는 고양이 Jun 24. 2020

<논리철학 논고>를 읽으며

우리는 언어의 홍수에 휩쓸리고 있다. 언어는 개인의 사유를 체계화하고, 의사소통의 편리성을 보장해주며, 사회가 통합된 집단 지성을 구축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놀라운 언어의 힘에 감명받은 우리는 강박적으로 언어에 집착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언어를 가르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세계의 교육 시스템은 언어능력과 수학능력을 제1순위로 취급한다. 이로써 언어는 세상을 인식하고 사유하는 우리의 이성을 구조화한다. 어쩌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 구조를 갖기 이전에 언어에 잠식당하는 것인지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하이데거와 더불어 현대 철학을 시작했다고 여겨지는 철학자이다. 그는 언어철학, 분석철학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그의 인생만큼이나 굴곡이 많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막내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천재형 인간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형제자매들도 역시 뛰어났던 탓에 집안에서는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청년기에는 버트런드 러셀의 수하에서 철학을 공부하는데, 그의 뛰어난 철학적 재능은 러셀이 철학을 그만두고 사회운동가로 전향하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의 철학을 담은 것이 <논리철학 논고>이다.


철학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생각한 그는 시골로 내려가 몇 년간 교사로 생활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철학적 연구를 이어가는데, 이 시기부터는 자신의 전기 연구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이때 쓰인 책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철학적 탐구>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의 관계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론, 일반 상대론과 유사하다고 한다. 이것은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어쨌든 그의 사상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모습


<논리철학 논고>는 70페이지 남짓의 분량이지만, 그 난해함과 복잡함으로 악명이 높다. 책의 구조부터가 1, 1.1, 1.11, 1.12와 같이 명제와 그를 보충하는 명제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함축된 표현들과 시적인 은유, 선언하듯이 던져지는 구절들은 마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어느 정도 의도한 바라고 느껴진다.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가 제기하는 물음은 크게 다음 세 가지이다.

1)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2) 어떻게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는가?

3) 왜 어떤 명제들은, 뜻을 지닌 명제들과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 않는가?


즉, 그는 언어의 올바른 사용 방법을 묻고 있다. 우리는 언어에 너무 깊게 잠식된 채로 살아왔기 때문에 언어가 본래 가지던 의미와 사용법을 망각한 것이다. 언어가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으로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이론’을 제시한다. 우리는 세상을 반영하는 어떠한 그림(표상)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명제는 세상에 대한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


2.1 우리는 사실들의 그림을 그린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그런데, 책 전체를 통틀어서 우리가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음을 통해서 세계에 실체가 존재함을 보인다. 이후로 그는 세계와 그 그림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기호와 상징, 논리적 구문론에 대한 엄밀한 논의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중반부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 001.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더욱이 그 복장의 외부적 형태로부터 그 옷 입혀진 사고의 형태를 추론할 수 없도록 그렇게 위장한다; 왜냐하면 복장의 외부적 형태는 신체의 형태를 인식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목적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그는 언어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실제 형식과 논리를 이해해야 함을 주장한다. 즉, 명제가 단순히 거짓이 아닌 무의미함을 보이고 ‘논리적 명료화’를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따라서 철학은 필연적으로 ‘언어 비판’이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명료화함으로써, 그리고 무의미한 것에는 그 무의미성을 확립함으로써 명료화 활동을 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자연 과학의 영역을 확정하며(4.113), ‘생각될 수 없는 것에 한계’를 긋는다(4.114).


책 전반에 걸쳐 있는 ‘반전의 미학’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첫 번째는 ‘세계’에 대한 논의이다. 논고의 첫 부분에서는 ‘세계는 사실들의 집합’(1.1)이며, 세계-사실-사태-대상으로 이어지는 위계의 관계와 각각의 속성들을 명확히 밝힌다. 또한, 이것은 언어-명제-요소 명제-이름의 관계에 대응시키며 전반부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서 그는 유아론적인 세계관을 주장하며 세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밝힌다.


마지막에는 어쩌면 논고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사다리의 비유가 자리한다.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명한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에 의하여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논고는 언어의 사용,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므로 개별 명제들은 세계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논고를 통해서 명제들의 특성을 이해하였으면 논고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6.54는 경이롭게 다가올 것이다. 책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스스로 깊게 생각해본다면 100년 전의 고독한 철학자와 토론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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