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입학하고 한 학기 동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와 룸메이트를 했었는데, 밤마다 신학과 과학에 대해서 (가끔은 감정이 격해질 정도로)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명 모두 정리되지 않은 사고의 조각들을 늘어놓는 형태에 가까웠지만 이때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친구의 입장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은, 자기는 성경적인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하고 있으며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기 위해' 과학을 한다는 것이었다. 말을 정확히 옮겨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맥락은 그러했다. 가장 극단적인 기독교 사상인 성서 무오설과 자연과학이 한 개인 안에서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면서 내가 대답해야 하는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나는 왜 자연과학이, 왜 물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계가 어떠한 원칙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확신이 없이 그 법칙을 밝히려는 노력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연구에 일평생을 바치기 위해서는 내 학문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믿음이 선행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즉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해 물리가 왜 그 이해와 통찰을 찾는 길이 될 수 있는지 정당화해야 했다.
만족할 만한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세계는 오직 내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산물이라는 유아론이 항상 발목을 잡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이나 티베트 불교의 고전 <티벳 사자의 서>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사상은 반증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 조지 버클리
결국에는 믿음이다. 인식의 저편에 자리하고 있는 실체의 모습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알아낼 수 없다. 그 베일을 들추어 '진리'의 참모습을 그려내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 끝없는 신기루를 좇으며 영원히 떠도는 방랑자가 되거나 내가 본 진리만이 참된 진리라는 만용에 빠지기 마련이다.
물리는 철저히 환원주의적이다.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의 공통점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그렇게 얻은 법칙들을 바탕으로 세계를 재구축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물리 법칙들은 '증명'되지 않고 '선언'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물리는 현실과 모순되지 않는 선에서 가장 단순한 것을 믿는 것이다.
몇 년 간의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이 다소 빈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맞다. '물리천국 불신지옥'이라 쓴 큼지막한 표지판을 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기에는 아직 신앙이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저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면서 무언가를 붙잡아야 한다면 가장 단순한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