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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리 Jan 04. 2025

고지식하다는 말에 킹 받은 이유

관계에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 난 안 해. 고지식한 방법이라고!


한 해의 마지막을 돌아보고 새해 계획을 세우자는 말에 대한 파트너의 대답이 충격이었다. 

정 힘들면 내가 쓴 거 보고 참고해서 쓰라는데도 여전히 싫단다. “고지식하다”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내가 싫어하는 단어라는 걸 아는지. 나를 공격하려는 말은 아닐 터였다. 게임하는데,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을 ‘고지식한 방법’이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으리라. 그럼, 당신이 신선한 방법을 제시해 봐요. 따라갈 테니. 했더니 그런 게 고지식한 거라며 고지식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더욱이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는 파트너의 대꾸에는 반발심이 일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 게 정말 자유로울까요? 목표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그 사이에 치고 들어오는 사건과 상황, 약속들이 당신이 원하는 자유를 방해할 걸요.라고 반박했다. MBTI라면 결론을 향해 촘촘하게 계획하는 J와 무계획이 계획인 P의 갈등이고, 에니어그램 성격 유형으로는 1번 개혁가와 9번 평화주의자의 충돌인 셈.


‘고지식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성질이 곧아 융통성이 없다는 말이다.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부분은 내게도, 파트너에게도 있다. 하지만 이번 제안을 고지식하다는 말로 묵살하는 건 서운하고 속상하다. 파트너의 원뜻은 연말연초라고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계획하는 것을 당연한 과제로 여기지 말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몇 년 전부터 이런저런 송구영신 도구를 면밀히 찾아내 같이 회고하고, 새해를 계획하면서 축하하고 감사했던 기억이 몽글몽글하다. 새해를 계획할 때는 이전 해에 계획한 것을 잘 지키고 성취했는지도 살폈다. 올해에도 그렇게 하려고 12월 초부터 찾았는데, 안 보였다. 송구영신 도구로 쓸 만한 마땅한 게 없어 계속 미뤘다. 12월 마지막 날에야 겨우 이거라도 하자는 식으로 간단히 써서 파트너에게 내밀었다.


가끔은 파트너의 제안을 따르면서 내 정신도 쉬고 싶다는 걸, 앞장서서 계획하고 제안하느라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는지 파트너가 알아주면 좋겠다.

왜 나만 같이 하려고 애쓰는지. 파트너가 진정 원하는 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주도하고 싶은데, 제안하는 말이 통제처럼 느껴져 싫은 걸까. 통제가 싫은 거라면 당신이 먼저 제안해 줘요.라고 반박하고 싶다. 내가 제안하고 파트너가 따라오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같이 하려는 마음을 내다가 실망하면 갑자기 허탈해진다.

동반자의 경우 ‘따로 또 같이’를 잘 조율해야 하는데, 내 경우는 파트너를 챙기는 마음이 앞선다. 문화생활이나 새로운 것에 접속한 적이 별로 없는 파트너와 함께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크다. 나만 성장하고 파트너가 뒤처지면 소통이 안 될까 걱정스럽다. 대화가 단절되면 우리 관계가 급속도로 냉랭해질 거라는 불안도 있고.


커피숍이나 식당에서 부부와 애인을 간단히 구분하는 방법을 들었다. 

각자 휴대폰만 보면 부부고, 서로 눈을 맞추고 대화하면 애인이라고. 아직 우리 관계에 희망이 있다면 휴대폰을 보며 밥을 먹는 파트너를 향해 밥 먹을 때만큼은 식사와 서로에게 집중하자고 웃으며 내가 말할 수 있다는 것.  


파트너가 잠시 쉬는 중이다. 

그동안 애써온 데다 감기까지 걸려 잘 쉬도록 배려하고 싶어 가사노동을 전담했다. 공동공간생활자로 가끔 빨래를 개어달라고 하고, 설거지를 말하고 싶어도 작년 연말까지 배려하자는 마음이 컸다. 파트너가 쉬는 동안 몇 번의 외식과 내가 말 붙여 대답한 것 빼고 파트너가 먼저 말을 건 게 언젠가 싶다. 그는 안방에서 게임하고, 나는 거실 식탁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뭔가를 얘기하면 방어적이 되거나 공격적인 말이 오갔다.


아파트 비번 바꾸는 일로도 의견이 안 맞았다.

주로 집에서 생활하는 내게 안전은 중요해서 현관 비번을 12자리로 설정했다. 파트너는 너무 많다며 올해에는 1234 네 자리로 하자고 주장했다. 전문털이범이 집을 털려면 아무리 어렵게 번호를 조합하고 많은 숫자를 설정해도 소용없는 짓이라는 게 주 요인이었고, 겨울이라 열두 자리를 누르는 게 너무 춥고 귀찮다는 이유였다. 그럼 네 자리와 열두 자리 중간인 여덟 자리로 하자고. 당신이 네 자리, 내가 네 자리해서 행운의 숫자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내가 먼저 만들어 파트너에게 가져가니 본인은 안 만들었단다. 

그냥 네 자리로 하자고 우겼다. 하루 종일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안전하지 않다는데, 계속 우길 작정이냐고. 내가 조합한 여덟 자리로 번호를 하자고 우겼다. 파트너는 마지못해 여덟 자리로 바꾸고, 서로 현관 밖에서 테스트했다. 현관에 들어오면서 파트너가 번호가 쉽다고 잘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번호를 잘 조합했다는 칭찬을 들으니 옥신각신하면서 상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동안 쓴 글과 필사 글을 뒤적이다 버지니아 사티어가 말하는 사랑에 눈길이 머물렀다.     


  집착하지 않고 사랑할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이해할 것입니다.

  간섭하지 않고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요구하지 않고 격려할 것입니다.

  당신이 죄책감 없이 자유롭기를 바라고

  당신을 비난하지 않고 바라보려 하며

  집요하지 않게 당신을 도우려 합니다.

  당신도 내게 그렇게 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로  함께하며

  서로를 살찌울 수 있을 겁니다.     


아~~~

또, 사랑의 반대편에 있었다.

신선한 사랑의 언어는 이해. 곁에 머무는 것. 격려하고 자유를 선물하는 일. 비난 없이 상대를 바라보고 돕는 마음인 것을.      




*커버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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