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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식 Jan 19. 2020

다시 온 창공 교회

10년 만의 재회

2017년 4월 30일 햇수로 15년 동안 근무했던 군을 떠났다.

2007년 7월 전방 5년 근무를 마치고 논산 항공학교로 이동했다.

육군항공 병과의 요람이며 그들의 고향.

그곳 푸른 초장위에 세워진 창공 교회는 정말 아름다웠다.

2007년 7월부터 2009년 5월까지 하나님과 교회를 성도분들과 섬겼다.

잊지 못하는 기억들이 있다.

첫 번째, 야간비행

집사님께서 담당하는 조종학생이 조종실력이 향상이 안되었다. 그 와중에 야간비행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조종학생이 집사님께 "'목사님이 함께 타 주시면 비행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했단다.

조심스럽게 나에게 이야기하시는데 조종학생의 마음이 읽어졌다. "네 함께 비행하시죠"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야간비행시간에 가보니 조종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는데 입을 떼지 못하는 그에게 "잘해요. 나는 하늘 구경할 테니"하며 웃음과 함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500MD뒷 좌석에 앉아서 야간투시경을 쓰고 하늘과 땅을 쳐다보며 그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집에는 아내와 세 아이가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그 조종학생의 이름도 모른다. 계속 군에 있다면 그리고 진급을 했다면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계기비행

내가 근무할 때만 해도 조종학생들은 계기비행을 해서 포항까지 다녀왔다.

교관 중 많은 분들이 교회 성도분이었기에 나는 당연히 가는 분위기였다.

2007년 가을로 기억된다.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UH-60 두대와 UH-1H 한대에 조종학생들과 교관 그리고 비행교육대장과 함께 세대의 헬기는 논산 기지를 이륙했다.

나는 UH-60을 탔다. 비행대장도 함께 타서 다른 헬기들과 교신을 주고받으며 비행을 했다.

대구 상공까지는 헬기 밑으로 펼쳐지는 지상을 보면서 갔다.

한창 벼들이 익어가는 시기였고 단풍도 물이 들어가는 시기였다.

하늘에서 보는 경치는 참 멋있었다. 가을 햇볕을 맞으면서 나는 어느새 구경보다는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를 잤는지 모르겠다. 몸이 옆으로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깜짝 놀랐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헬기는 오른쪽 왼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앞으로 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얼 보고 가는 것인지 방향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조마조마했다.

이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머리를 스치고 갔다.

30여분을 그렇게 요동치던 헬기가 구름을 뚫고 하강하니 포항공항이 눈 앞에 보였다.

내가 탄 헬기를 포함한 UH-60 두대는 무사히 포항공항에 착륙했다.

그런데 UH-1H가 보이지 않았다.

비행교육대장님이 내 손을 잡으면서 "목사님! 헬기 무사히 올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하셨다.

그분은 종교가 없었다.

10분이 지나도 헬기는 보이지 않았고 비행교육대장님은 비 내리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둥둥둥 소리를 내며 마지막 헬기가 포항공항에 착륙했다.

옆에서 들리는 깊은 한숨 소리의 의미를 굳이 해석하지 않았다.

수고한 분들을 데리고 포항공항 앞에서 먹었던 물회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세 번째, 헬기 추락

근무하는 동안 군에서 세 번의 추락 사고가 있었다.

시차를 두고 일어난 추락 사고 때마다 학교는 깊은 침묵의 바다였다.

사고로 순직한 조종사들은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동기였고, 누군가에게는 존경하는 선배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아끼는 후배였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교회 성도분들은 남일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그 분위기는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가슴 아픈 추억도 있는 이곳에 작년 12월 4일 다시 왔다.

다른 부대로 이동하는 군종목사가 후임이 없이 떠나게 되었다. 어떻게 내 이야기를 듣고 연락을 했다.

사정을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달 반이 흘렀다.

나와 두 번째 만나는 분들도 있고 세 번째 만나는 분들도 있다.

나는 걱정도 되었다.

나와의 재회가 그분들에게 기쁨이 되어야 할 텐데, 내가 그때보다 더 성숙했을까?, 내가 말씀을 전한 대로 나도 살았고 그들도 살았을까? 별별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갔다.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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