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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아 Dec 07. 2022

멋이 아니라 맥을 봤어야 했다

콘텐츠(contents)에 앞서 콘텍스트(context)를 볼 것

뭔가를 썼는데 다 지웠다. 이 글의 소제가 '멋'이 아니라 '맥'을 봤어야 한다는 건데, 또 멋을 부리고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글도 진부해지고 재미도 없고 점점 내 역량을 벗어나는 것만 같아서 과감히 지워버렸다. 바로 이게 문제다. 계속 있어 보이려고 하는 것. 오늘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다.


출판사를 차릴 때 누구나 다 하는 고민이 있다. 


'첫 책은 뭐로 할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고민도 이어진다.


'최소 원고 3개는 갖고 출발해야 한다는데, 뭐로 해야 하지?'


그 출판사의 첫 책. 이게 창업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중대하고 중요하고 또 우리 출판사의 운명을 판가름 지을 것 같고 이것으로 아주 많은 게 결정날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중요하긴 하다. 이 첫 책으로 총판 계약, 서점 계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첫 책은 우리 출판사의 이미지이자 가능성의 잣대가 되기도 하고 전문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무거운 경제경영서를 준비했다면 서점에서는 '이 출판사는 앞으로 이런 유형의 책을 내겠구나' 하는 프레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첫 책을 '대박'이 날 법한 아이템으로 준비하고 싶은 건 누구나 소망하는 바인데, 문제는 바로 '첫'이라는 점이다. 출판사 대표가 출판계에서 이름값이 있거나 짬이 꽤 돼서 서점에 빵빵한 인맥이 있다든가, 흥행수표 같은 저자의 전담 편집자여서 그 저자를 모시고 출판사를 차렸다든가, 자본이 빵빵해서 투자 여력이 충분하다던가 하면 모르겠지만 보통은 이렇게 큰 무기를 갖고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프리랜서로 일한 시간이 회사에서 일한 시간보다 길기도 했고, 외주자로 일을 하면 아무리 기획에 대한 관여도가 높았다 한들 나의 저자라기보다 출판사의 저자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상도'상 저자를 빼가는 그림도 그다지 좋지는 않다. 이런저런 것들을 따지다 보면 그럼 도대체 어떤 책을 첫 책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계속 발목을 붙잡게 되는데 당시 나는 이에 대해 그렇게까지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첫 책이 정말 중요한 건 사실인데, 또 막상 어떤 출판사의 첫 책이 대박나는 경우도 거의 드문 일이다. 물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대박'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우리 출판사의 이미지, 전문 분야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더 방점을 찍었던 것 같다. 나는 자기계발서, 경제경영서 전문 편집자였지만 이 분야야말로 가장 시장 변화에 민감한 장르로 굉장히 트렌디한 책들을 만들어야 하고 그 말인즉슨 작은 출판사의 생존 전략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박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계속 팔리는 책, 대형 출판사, 메이저 출판사에서 오히려 건드리지 않는 책을 만드는 게 맞다. 


그래서 첫 책은 '인문/심리' 분야의 국내서를 냈다. 이 책에는 사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창업을 할 때 기획한 게 아니라 프리랜서 기획자로 일할 때 준비한 책이었는데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여러 출판사에게 거절당한 원고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중간 이 책 때문에 내가 창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무도 안 내면, 내가 내지 이런 패기로. 그런데 정말 2년 정도 갖고 있던 그 원고는 우리 출판사의 첫 책이 되었다. 섭식장애, 다이어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심리 책 <나의 식사에는 감정이 있습니다>가 그렇게 탄생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권 한 권에는 저마다의 명분도 있고 출판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사실 작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자본도 없고 아직 성공 이력도 없기에 계약에 대한 허들을 높이기가 쉽지 않다. 메이저 출판사에서 일할 때야 엄청나게 그 조건을 따지기도 했지만, 지금 내 처지에 무슨? 이런 생각 때문에 그렇게까지 까탈스럽게 굴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기획과 기획 간의 연결성을 촘촘하게 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다. 창업을 할 때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었듯, 책을 기획할 때도 꽤 즉흥적이 되기도 한다. 그놈의 '느낌'!! 느낌 때문에!!! 느낌이 좋으니까!!! 스토리!!! 나한테 특별하니까!!! 12년 차 기획자의 감, 이런 걸 믿는 것이다. 그냥 지금 돌아보면 전반적으로 이성이 마비되었던 것 같단 생각이다(모든 출판사 창업자가 이런 건 아니다. 처음부터 엑설런트하게 잘하시는 분들도 있다).


물론 그동안 기획, 편집한 짬이 있으니 그냥 막 낸 책은 없다. 그래서 난 우리 책 한 권 한 권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 만든 책도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문제는 그 기획 간의 연결성이다. 한마디로, 브랜드 관점에서 기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우리 출판사가 정확히 출판업계의 어느 좌표에 놓여야만 경쟁력이 있는지를 냉정하게 돌아보진 못했다. 그 좌표를 잘 찍어야 그 좌표 주변에 기획들을 늘어놓으며 우리 영역을 넓혀가는 것인데 말이다.


사실은 내 정신 상태부터 문제였다. 작년 여름부터 올해 초까지, 약 6개월간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정신과 치료와 심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니 정신 상태가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 올해 우울증에서 좀 빠져나가려나 보다 하던 시점에 결혼 후 7년 만에 생긴 아기를 유산했다. 인생이 뭐 뜻대로 되는 게 있냐마는, 요 몇 년간 수차례 받은 수술 등으로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고 출판사를 창업하고 내가 한번도 써보지 못한 단위의 돈이 매달 통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니(그런데 들어오는 건 왜 이렇게 적은가) 현타도 오고 후회도 하고 이러다 길가에 나앉는 건 아닌가 엄청난 공포에 휩싸여 지낸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그땐 그냥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와 같이 버티는 시기기도 했다. 사업을 계속 이어갈 용기도, 접을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계속 버티고 싶기도 했다. 이 정도로 그만두면 얼마나 우스워질까 싶어서.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직접적으로 하는 사람도 없는데, 침대에서 혼자 시나리오를 수없이 양산해냈다. 예전 출판사 동료들이 얼마나 날 우습게 알까, 다들 날 비웃겠지부터 시작해서, 부모님께도 죄송하고 함께하는 친구들에게도 미안하고 이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정신으로 무슨 생존 전략이니 기획 전략이니 깊이 고민할 수 없었던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다. 그래도, 함께해주는 팀원이 있어 그들을 만날 때만큼은 '가장 정상적인 상태'였고 그때 반짝 하는 에너지로 그렇게 이어갔던 것 같다.


멋이 아니라 맥을 짚어야 했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멋도 없었다. 내가 '멋'이라고 표현한 것은 전략이 아닌 이미지를 쫓았다는 의미다. 사람들 눈치를 보고 있으니 자꾸만 껍데기에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래서 사무실, 홈페이지와 같은 것들에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쓰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창업 초기 특유의 조증 수준의 격앙된 감정이랄까. 일종의 '뽕' 같은 것으로 무장되어 정작 우리 출판사의 전문성이나 브랜드, 강점 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자꾸 내가 '맥'이라고 하는데, 맥락을 말한다. 맥락은 미시적인 것부터 거시적인 것까지 다 총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책 쓰기가 블로그 쓰기나 어떤 글쓰기보다 난도가 높은 이유도 '맥'을 짚어가며 써야 하는 호흡이 긴 글이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소제와 소제, 장과 장의 연결성도 중요하지만, 그 책의 포지셔닝도 중요하고, 그 책이 어떤 베스트셀러 혹은 어떤 대표성을 가진 책의 계보를 이을 것인가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 


책 한 권도 어떤 맥락 속에 놓여야 하듯이, 출판사가 내야 하는 책의 리스트도 마찬가지다. 그 리스트 간의 연결성이 촘촘할수록, 규모가 작은 출판사는 살아남는 데 유리해진다. 촘촘하다는 것은 밀도가 높다는 것이고, 그만큼 축적될수록 힘이 세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규모가 큰 종합출판사를 지향한다고 해도 중구난방으로 책을 낼 수는 없다. 


첫 글에서 우리 책 10종 리스트를 공개하며 그 연결성에 대해 물은 이유가 그것이다. 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하물며 독자가 느끼겠는가. 10종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맥'이라는 게 생기는데, 그 사이 사이가 엉성하니 덩어리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출판기획자로, 개인으로 일할 때는 이런 맥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내가 맡은 책 혹은 계약을 성사시킨 책이 그 출판사에서 성공적으로 론칭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전후맥락 같은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 포트폴리오상의 맥락만 중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또한 촘촘할 필요까진 없었다. 어차피 거의 자기계발서, 경제경영서였기 때문에 그 분야에 속한 책이면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콘텐츠'가 가장 중요했다. 내가 맡은 책의 콘텐츠가 어떤 강점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게 주 업무였다.


그러나 출판사를 창업하면 콘텐츠에 앞서 콘텍스트(context)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책과 책 간의 연결성은 곧 출판사에게는 일관성이 된다. 그리고 그 일관성이 브랜드를 강화시킨다. 그래도 어쨌든 소인에게는 10종의 책이 남아 있으니, 앞으로는 그 책들 간의 틈을 좁혀주는 책을 만들고자 한다. 다행히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심폐소생할 수 있는 여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몇 년 뒤에는 에디토리 출판 목록을 보고 '여기는 ~~~한 출판사네!'라고 명쾌하게 누구나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큼, 앞으로 맥락을 잘 만들어가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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