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차, 트리아카스텔라 - 사리아 17.8km
8월 26일 토요일
7시에 트리아카스텔라 알베르게 아웃. 온도는 13도.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다. 어제 옷과 장갑을 세탁하지 않았으니 건빵 주머니에 그대로 있어야 할 텐데, 왼쪽만 사라졌다. 장갑에 다리가 달려서 도망간 것은 아닐 테니 나의 부주의로 원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정말 잘 사서 잘 썼다 하는 물건이라 아쉽긴 한데 이제 와서 새 장갑을 살 것까진 없겠다.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까페에 들렀는데 이럴 수가, 마시모가 여기 있었다. 진짜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마시모다. 물론 이제 싫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타나지 않으면 섭섭하다. 그리고 잠시 후 프로미스타 이후로 한참 못 봤던 루까가 나타났다. 어제 속도를 늦추어 트리아카스텔라에서 멈추니 뒤이어 오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하루 이틀만 기다리면 더 많은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셋이 커피를 마시며 곧 만나게 될 갈림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시모는 나에게 초행이니 사모스로 통하는 길을 권하였다. 수도원이 아름답다나 뭐라나. 하지만 물론 말을 들을 내가 아니었다. 동전을 던져 헤드이면 사모스, 테일이면 산실 San Xil 쪽으로 가기로 했고, 테이블에 떨어진 센트 동전은 우리에게 숫자 5를 보여주었다. 다시 만류하는 마시모에게 결정은 내려졌다 말하고 까페를 나섰다.
어느 길로 향하든 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걸 알기에, 사모스 쪽을 못 보는 아쉬움은 없었다. 다음번에 반대쪽으로 가면 된다. 두 길을 동시에 갈 순 없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아침나절 오솔길을 걷는 느낌이 상쾌했다. 기온이 내려가 그런지 항상 산길에서 달려들던 파리가 한 마리도 없었다. 서늘한 가을 날씨에 기분 좋은 하이킹을 이어나갔다.
경사가 제법 있지만 어제와 달리 다리에 힘이 넘쳤다. 지난밤에 잘 쉰 덕 이리라. 아니면 오래간만에 금주를 해서 그럴 수도 있다. 평소엔 술을 즐겨 마시지 않으나, 순례길은 예외였다.
여기에선 마셔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새 친구를 만나 한 잔, 떠나는 친구를 보내며 한 잔, 걸음을 마치고 하루의 작은 성취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또 한 잔.
한국에선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소주를 싫어해서이기도 하지만, 마실 이유가 없어서라는 걸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호주와 프랑스에서 와인을 접할 수 있었던 건 커다란 행운이었다.
루까와 마시모.
산속이라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구름이 내려와 안개가 되어 앉으면 금방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고, 또 금세 맑아져 나뭇가지 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보이기도 한다.
급 경사라도 흙바닥이 폭신하여 발바닥이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순례자들의 발에 밟혀 잘게 부스러진 낙엽이 쿠션처럼 신발을 감싸주었다. 포장도로가 나올 땐 최대한 길가의 풀을 밟으며 걸었다. 비 오는 날엔 고생 좀 하겠다 싶은 구간이 좀 있었다. 젖은 흙길에 급경사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여기는 산실 길의 명소, 기부제 쉼터 Terra de luz이다. 60-70 년대 히피들이 본거지로 삼았을법한, 자유로운 영혼의 집합소처럼 생겼다. 러브 앤 피스.
기분 좋게 먹고 마시며, 순례자들과 주인장들과 대화를 하고, 우쿨렐레를 뚱땅 거리며 노래를 했다.
아무나 붙잡고 사진을 찍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처음 봤을 땐 그리도 맘에 들지 않던 마시모와 투 샷을 찍는 날이 올 줄이야.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다. 모두에게 친절해야 한다.
한 시간 만에 쉼터를 떠나 길을 재촉했다. 좋은 기운을 받아 날아갈 듯한 기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러너스 하이가 금방 찾아왔다. 먼저 쉼터를 떠난 비비와 토마스, 카예따나와 테레사, 구스타보와 죠바나를 지나쳤다. 기분 좋게 올라온 엔돌핀이 가라앉지 않도록 한참을 더 달렸다. 등에 땀이 촉촉하게 올라왔다.
저 멀리 사리아가 보였다.
11:48 사리아 도착. 카페에서 30분, 쉼터에서 55분을 쉬었으니 트리아 카스텔라에서 여기까지 3시간 반 정도 걸렸다.
사진은 사리아 입구의 순례 안내소이다. 세요와 함께 뿔뽀가 맛있다는 식당 리스트도 얻었다. ‘오늘은 먹고 말거야 문어숙회.’
잠시 앉아있으니 사촌지간인 주제페와 로베르토가 함께 도착했다. 오늘도 같은 숙소에 묵고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뿔뽀를 먹으로 가잔 말에 주제페는 군침을 흘리며 넋이 나가버렸다. 머릿속을 이미 문어가 점령해 버린 듯 보였다. 그러나 불쌍한 로베르토는 안색이 어두웠다. 푸드 알레르기가 많아서 먹을게 별로 없다고 했다.
마을 어귀의 까페에서 알렉산드로와 이레네를 만났다. 난 어제가 우리의 마지막일 줄 알았다 하니 상긋 웃는다. 앞선 쪽이 꾸물거리면 다시 만나게 된다.
Obradoiro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숙박비는 10유로. 1회용이 아닌 진짜 시트가 있다. 침대 사이에 커튼도 있고 1인 1 콘센트 가능. 와이파이도 잘 된다. 기념품 가게에서 리셉션을 겸하고 있다.
주방이 있어서 주제페와 로베르토는 여길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오늘 저녁은 무조건 파스타 일 거라고 예상했다. 어떤 파스타일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수십 종씩 읊어대는 파스타 종류를 기억조차 하기 어려웠다.
뿔뽀를 잘한다는 식당을 찾아 강가로 내려왔다. 주제페와 나는 뿔뽀를 원했지만, 결국 로베르토를 버릴 수 없어서 그와 같은 식당에서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로베르토는 치킨 들어간 빠에야를 먹었다. 치즈도 못 먹는 이탈리안이라니 참 안 됐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잠시 한글 교습이 있었다. 몇 자 알려주니 빠릿빠릿 제법 잘 읽었다. 이탈리아, 벨라챠오, 일마레, 로베르토 이런 식으로 써주니 곧잘 따라 읽고 쓰기를 한다. 얘들이 똑똑하기도 하고 한글 시스템이 배우기 쉽기도 하다.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왼쪽부터 마리오, 까예, 비비, 산티아고, 테레사.
저녁은 역시나 파스타이다. 조용히 한입 찬스를 쓰면 된다. 맥주를 잔뜩 사와 한 캔씩 돌렸다. 로베르토는 치즈를 못 먹으니 자기 것 1인분만 바질 페스토를 만들고는 모두를 위해서 까르보나라를 만들었다. 착한 녀석 같으니.
슈퍼마켓에 관찰레가 없다고 투덜거리지만 베이컨만으로도 까르보나라 향기는 정말 기가 막혔다. 얘들 사전엔 병에 담긴 소스란 없다. 무조건 계란과 치즈를 섞어 직접 만든다. 파스타엔 진심인 애들이다. 관찰레를 안 넣은 까르보나라는 불법이고 범죄라고 하는 녀석들이다.
작은 저녁 파티가 벌어졌다. 모두에게 까르보나라와 캔맥주가 돌아가고, 빵만 뜯고 있던 스페인 소녀들에게도 파스타를 나눠주어 자연스레 합석이 이루어졌다. 배가 부르고 맥주가 들어가니 다들 행복해졌다.
주제페와 로베르토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래 자랑스러울만하다. 너희가 이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으니.
07:00 ~ 11:48
트리아카스텔라 - 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