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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3. 2024

33. 페데리카와 멜리데로

27일 차, 포르토마린 - 멜리데 39.2km

8월 28일



포르토마린 뉴타운 한가운데, 올드타운과 함께 수몰될 뻔한 교회가 통째로 옮겨져 아직도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6시에 마을을 떠나며 한 번 더 눈에 담아두었다. 벽돌을 해체하여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마을을 나서니 그 바깥엔 가로등 없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흐려 별조차 보이지 않고, 곧 안개비마저  뿌릴 태세였다. 샛길을 통해 울창한 숲에 들어서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처음으로 헤드램프를 켰다. 이것도 온타나스 가는 길에 주운 것인데, 혹시 임자가 나타날까 하여 가방에 매달고 다녔으나 끝내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덤불 속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날 때마다 흠칫하였으나, 사람에게 해를 끼칠 만한 존재는 없는 걸 알기에, 곧 마음을 다스리며 발걸음을 옮기었다. 다시 본 순례길로 합류하자 저 멀리 간간히 반딧불 같은 순례자의 헤드램프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날이 밝을 때쯤 만난 까페에서 아침을 시켜 먹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40여 분 가량 앉아있자 줄지어 속속 아는 얼굴들이 도착했다.


페데리카는 그냥 지나치려던 것을 소리쳐 붙잡았다. 어인 일로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나 했더니 포르토마린에서 이미 커피를 마시고 왔다고 한다.


알고 보니 포르토마린에서 같이 아침을 먹자고, 6시 반에 보자고, 몇 번이나 나에게 DM을 했다는데 답장이 없어 혼자 먹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기존에 쓰던 요금제가 그저께부로 끝났지만, 충전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선 선형 구조로 움직이기 때문에 길목을 지키고 있으면 다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이 없는 이틀간 그런대로 살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였다. 통신이란 소통이고 양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전교에서 딱 두 명만 휴대폰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그중 한 명이었는데 혼자만 가지고 있어선 이게 또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정작 전화를 걸 곳이 없어 한동안 그냥 가지고만 다녔던 기억이 있다.


모바일 데이터가 없어 지도앱을 쓰지 못할 땐 길의 화살표를 더 신경 써서 찾게 된다.


스마트폰을 쓰기 이전엔 지도만 가지고 여행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그게 얼마 안 된 것처럼 느껴졌다.


페데리카, 어거스틴
로베르토, 주제페


전에 사리아 순례 안내소에서 이야기 들었던 경찰관들을 만났다. 각국에서 경찰들이 파견 나와 자국의 순례자들을 지키고, 국제적 협력도 도모하는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은 스페인 가르디아 시빌, 독일, 프랑스, 루마니아에서 나와있다. 각국 경찰들이 나라별로 세요를 주니 모으는 게 또 하나의 재미이다.



사리아 안내소에서 말하길 한국 경찰관도 있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혹시 한국 경찰관 봤냐고 물었더니, 오피서 킴 하고 얼마 전 같이 근무를 섰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각국 경찰들, 기사단원, 페데리카와 함께.



이번 순례 중 세 번째 만난 비였다. 비가 오전 내내 오락가락하여 핑곗김에 있는 카페마다 죄다 들러 쉬었다. ‘페데야 우리 멜리데까지 갈 거라며 이 속도로 괜찮겠어?’


유심도 사고 ATM도 들를 겸 약간 먼저 걸어 팔라스 데 레이에 도착했다. 유심 파는 곳을 찾아 스페인 유심 40기가짜리를 10유로 주고 구입했다.



팔라스 데 레이의 이 가게에서 유심도 팔고 있다.



데이터 없이 불편한 점이 있다면 와이파이 없는 까페에 앉아 글을 못쓴다는 것. 쓰던 프랑스 요금제를 갱신할까 하다 저렴한 프로모션 요금제가 있길래 풍족히 쓰기로 했다. 원래 쓰는 요금제는 프랑스 내 100기가에 유럽 로밍 10기가라 프랑스 바깥에선 좀 아껴 써야 한다.


먼저 도착한 주제페, 로베르토, 테레사, 마리오, 산티아고는 여기 알베르게에 투숙했다.


볼일을 보는 사이 도착한 페데리카와 어거스틴이 마을 핏제리아에서 기다린다 했고, 점심거리를 찾던 로베르토와 주제페도 자연스럽게 함께 거기로 향했다.


이제 메뉴를 고를 차례인데, 파인애플 토핑이 메뉴에 보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를 좋아하는 편이다. 이거 이야기 꺼낼 때 이탈리안의 반응은 익히 아는 바지만, 짐짓 일부러 ‘나 파인애플 피자 시켜도 되냐’ 했더니 역시나 이탈리안들은 길길이 날뛴다. 주제페는 내가 파인애플 들어간 거 시키면, 그거 먹는 걸 보느니 자기 머리를 쏘겠다고 한다. 재미있는 녀석들이다. 지금은 고든 램지도 노선을 수정해 파인애플 피자를 파는 세상이다. 하지만 주제페가 혀 깨무는 꼴을 볼 순 없으니 쵸리소가 들어있는 걸로 주문했다. 하와이안 피자를 먹고 싶다면 이탈리안과 절대 동행해선 안된다.

화덕이 시에스타를 하는 건지, 피자는 느지막이 나왔다. 피자를 먹고 커피도 한잔 하고, 세시가 다 되어 팔라스 데 레이를 떠났다. 사실 어젯밤에 같이 가겠다 확답을 한건 아니라 굳이 안 가도 되고, 본인도 나더러 걷기 싫으면 그냥 여기 있으라지만, 거의 한 달간 함께 해온 페데리카를 그냥 보내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차피 멜리데까지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가볍게 길을 나섰다. 페데는 일정상 내일모레까지 산티아고로 들어가고 싶다 했다.

카사노바의 공립 알베르게 앞을 지나다 한창 빨래 중인 마테오와 안젤라를 만났다. 둘은 빨래하다 말고 손이 젖은 채로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오늘 여기 알베르게엔 단 4명뿐이라 한다. 이들은 시끄러운 팔라스 데 레이를 피해 조금 더 걸어왔다. 내일도 아르수아를 약간 피해서 묵을 예정이라 했다. 빗방울은 온종일 오락가락하나, 오후 들어선 많이 개었고 비는 한결 덜 오고 있었다.



갈리시아에서 집집마다 흔히 보이는 저장고, 오레오이다. 또 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 말뚝처럼 세워놓은 십자가이다. 곳곳에 만여 개가 있다 했으니 마을을 지날 때마다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늦은 오후가 되니 길 위에 그 많던 순례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어딘가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간 것이다. 이 시간에는 이동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쉬엄쉬엄 6시가 다 되어 멜리데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괜찮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계속 걷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멜리데는 거기 그대로 있으니 계속 걸으면 언젠간 닿는다.



페데는 혼자 걷는 심심함을 못 참는 타입이라 같이 걸은 것이고 그녀도 이맘 아는지 몇 번이나 고맙다 한다. 그리고 난 정해진 귀국 일정도 없다.



갈리시아의 공립 알베르게는 다 비슷비슷하다. 숙박비 8유로에 그럴듯한 건물, 와이파이가 없고, 문 없는 샤워실, 집기가 하나도 없는 주방. 머리맡에 달린 전등까지 똑같다. 전등 밑에 usb 충전 단자가 있는 걸 모르는 분들이 꽤 많다.


usb 충전단자가 숨어있다


멜리데의 명물 하면 문어, 뿔뽀다. 바다에서 100km는 떨어져 있는 내륙 도시에 문어가 유명하다는 건 살짝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순례자들에게 뿔뽀를 먹는 기쁨을 제공해 온 곳이며, 뿔뻬리아라고 해서 문어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뿔뻬리아엔 각각의 의자가 아닌, 기다란 나무 의자에 순례자들이 나란히 앉아 먹는 전통이 남아 있다.


어제 포르토마린에서 먹었기 때문에 굳이 당기진 않았다. 그런데 자기는 문어를 못 먹는 주제에 페데리카가 꼭 가보자고 졸라댔다. 친구가 가보랬다고 그러는데 내가 문어를 먹었으면 하는 눈치다. 여길 지나는 순례자는 문어를 먹는 게 전통이므로 날 굳이 데려온 것이다.


뿔뻬리아 아 가르나차와 에제키엘이 제일 유명한 곳이라 했다. 순례길 상에 있으므로 지나가다 점심으로 먹어도 좋고, 하루 머무른다면 저녁 술안주로도 좋겠다. 가르나차를 슬쩍 구경하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에제키엘로 향했다. 페데는 식도락가라 먹는 건 기가 막히게 잘 찾아다닌다. 순례길에서도 가장 평점 좋은 식당만 골라 들어간다. 얘가 앉아 있는 곳은 그 마을에서 가장 맛있다는 집으로 보면 된다.



저 들통 안에 문어를 삶고 있고, 삶아진 문어를 척척 썰어서 올리브기름과 소금을 치고 파프리카 가루를 뿌려 내온다. 갈리시아 빵도 빼놓을 수 없다. 포르토마린에서 어제 먹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부드럽고, 질깃한 맛이 하나도 없다. 가격마저 어제보다 훨씬 저렴하다. 역시 전문점은 다르구나 감탄하며 한 접시를 비웠다. 요샌 맛있는 거 먹을 때 어머니 생각이 난다. 해산물 참 좋아하시는데..



페데는 갈리시안 브로스(푹 고아 끓인 수프)를 시켜 먹었다. 용기를 내어 뿔뽀 한 점을 입에 넣고 씹다 바로 뱉어내었다. 감촉과 생김새가 너무 징그럽다나 뭐라나.



산티아고를 목전에 두고 멜리데의 식당은 신입 순례자들로 왁자지껄하였다. 하루의 성취는 정말 축하할만하고 기쁜 일이다.


식사 후 통금이 다 되어 돌아왔다. 공립 알베르게의 화장실에선 취한 대학생들이 토하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휴게실 테이블은 담뱃가루로 덮여있었고 바닥에 와인병이 나뒹굴었다. 내일은 마테오와 안젤라처럼 큰 도시를 피해서 묵을까 생각하였다.

마지막 50km의 순례를 후딱 끝내고, 한 달간 매일같이 입어온 거지꼴 옷을 몽땅 불태워 버린 후, 진짜 목욕을 하고, 진짜 침대에서 아침 늦잠을 잘까 하는 생각에 시달렸는데, 막상 이제와선 남은 거리를 천천히 나누어 갈까 하는 생각이 커졌다. 28일 만에 여기까지 왔으면 지나치게 빨리 온건 아닐까.

5:50 ~ 17:50

포르토마린 ~ 멜리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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