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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글쓰기는 안녕한가요

머리, 가슴, 발 중 당신은 어떤 글을 쓰고 있나요?

by 조이홍

1999년 아직 겨울의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3월의 어느 날, 막 대학을 졸업하고 중견 식품기업 인턴으로 한 달여 근무하던 저는 대기업 계열사에 영업사원(네, 맞습니다. 정직원!)으로 입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신입사원을 그룹 공채로만 뽑았으나, 운 좋게도 그해 지분이 100% 외국계 기업으로 넘어가면서 특채를 뽑게 된 덕분이었습니다. 1, 2차 면접을 가뿐하게 통과하고 최종 면접만 남겨두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딱히 떨리지 않았습니다만, 최종 면접 직전에는 야전상의도 챙겨 입지 않고 동계 훈련 뛰는 이등병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이가 부딪혀 계속 '딱딱' 소리가 났습니다. 인생에서 그토록 강렬하게 긴장했던 순간이, 앞으로는 두세 번 더 있을 터였지만, 있었나 싶었습니다.


영업총괄중역이자 부사장인 최종 면접관실에 들어갔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인상 좋은 아저씨일 터였지만, 그때는 뿔 난 도깨비를 보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편하게 앉으라는 말에도 결코 편하게 앉을 수 없었습니다. 남들이 씨름선수냐고 물을 만큼 튼튼한 두 다리가 북풍에 방치된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더랬습니다. 분명 이것저것 다양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을 터였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건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 질문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머리로 하는 영업, 가슴으로 하는 영업, 발로 하는 영업 중에 앞으로 자네는 어떤 영업을 하겠나?"



며칠 전 브런치 시스템으로부터 또 '경고장'을 받았습니다. 이미 여러분도 수차례 받았을 바로 그 경고장입니다. 게으름도 단단히 한 몫했을 터이지만, 사실 글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제 경우는 아무래도 '독서'가 가장 좋은 글쓰기 원천인 듯합니다. 책을 읽으면 왠지 써야 할 글들에 관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거든요. 그런데 가끔은 책을 읽어도 좋은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나라가 어수선하거나 회사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마음이 편해야 글이 써지지.'라며 습관처럼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줍니다. 글감이 있어도 전달한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글쓰기가 어렵습니다. 글 못 쓰는, 아니 안 쓰는 핑곗거리가 어찌 이리도 많은지요, 참.


글쓰기 슬럼프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 이웃집 아저씨 같았던 민머리 부사장님이 20대 중반의 제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머리로 쓰는 글, 가슴으로 쓰는 글, 발(행동)로 쓰는 글 중에 자네는 어떤 글을 쓰고 있는가?"


곤충이야 머리, 가슴, 배로 나눌 수 있지만, 곤충도 아닌 글쓰기를 머리, 가슴, 발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모든 일이 그러할 테지만, 글쓰기도 머리, 가슴, 발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완성하기 쉽지 않습니다. 경험이 없다면 글쓰기도 없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제게 있어서 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소설을 읽던지 하다못해 만화책이라도 읽어야 글감이 떠오르니까요. 여행을 간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난 색다른 경험을 통해서 글쓰기가 비로소 시작됩니다. 물론 일상에서 글감을 발견해 탄식을 자아내는 훌륭한 글을 쓰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아직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신의 숫자, 완벽한 균형과 조화의 숫자 3박자를 통해서만 비로소 글쓰기가 가능한 저는 겁쟁이랍니다(아, 이 부분은 버즈의 '겁쟁이' 오마주입니다).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것, 그런가 하면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쉬운 것, 고것이 글쓰기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제게는 참으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입니다. 가끔 브런치에 글을 쓸 때, '좋아요 몇 개나 나온다고 이걸 하고 있나' 한숨이 노트북을 날려버릴 만큼 세차게 휘몰아치는 날이 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어느새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저도, 여러분도요.


25년 전, 저는 최종 면접관에게 "저는 발로 뛰는 영업을 하겠습니다. 머리로, 가슴으로 영업하려면 먼저 발에 땀 차게 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실함이 저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요. 어쨌든 저는 입사에 성공하고 20년 장기 근속했습니다. 누군가는 성실함이 가장 쉽다고 말하지만, 사회생활하면서 성실함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어제와 다르게 행동해야겠지요. 어쩌겠습니까. 일단 뛰어보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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