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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스나 Nov 04. 2022

속옷 가게 여자

“사이즈는 어떻게 되시나요?”

 가끔 나들이 가는 큰 시장 숙녀복 건물에는 브래지어와 팬티, 잠옷을 파는 속옷 가게가 있다. 가게 안에는 다양한 브래지어와 팬티들이 종류별로 쌓여있고 벽을 돌아가며 갖가지 무늬의 잠옷들이 걸려있는, 그리 크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1층 입구 쪽에 자리 잡은 탓인지 작은 가게 안에는 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날 친구는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사고 나도 티셔츠와 바지를 사고 또 뭐 없나, 가게들을 몇 번이나 뺑뺑 돈 터였다. 우리는 서로 고른 옷을 보아주고 훈수했다. 예를 들어 내가 맘에 드는 민트색 티셔츠를 골라 몸에 대고 바라보면 친구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럼 나는 미련 없이 물건을 도로 매대에 놓고 돌아섰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옷가게 주인들은 정작 옷을 사는 사람보다 그 옆에 있는 동행에 신경 썼다. 

 1층 속옷 가게를 지나칠 때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브래지어를 바꿀 때가 되었어.”

 “나도.”

 친구가 가게 안을 훑으며 대답했다. 가게에 있는 제품들은 색도 베이지 계통으로 비슷비슷하고 디자인도 단순했다. 말하자면 유명 브랜드 제품들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속옷, 특히 브래지어는 자주 구입하게 되지 않았다. 어디 구멍 나지 않는 한 열심히 빨아 입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하향 안정세인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브래지어의 끈도 같이 늘어졌다. 그런 것은 멀쩡한 겉옷의 실루엣을 망가뜨리곤 했다.

 그러나 가게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때까지 우리의 신조는 ‘옷은 대충 사 입지만 속옷은 백화점에서’였다. 살갗에 직접 닿기도 하려니와 특히 브래지어는 디자인에 따라 사이즈나 기능이 다양해서 잘못 고르면 안 맞거나 불편했다. 컵 사이즈는 A인데 밑가슴둘레가 B이면 낭패고 그 반대여도 마찬가지였다. 속옷 코너에서 옷 입은 채 대충 줄자로 재는 것도 맞지 않을 때가 많았다.  

 “착용하신 브라 위에다 걸쳐보시면 돼요.”

 백화점 란제리 코너의 여직원은 대체로 친절하면서도 끈기가 있었다. 얼마든지 걸쳐보라고 탈의실로 디밀고는 밖에서 차분히 기다렸다. 백화점은 비싼 만큼 종류도 많고 디자인도 다채로운 데다 탈의실도 많아 옷을 벗고 입는데 여유가 많았다. 그러나 두세 겹의 옷이라도 입고 벗는 건 번거로웠다.  

 “뭐, 이제 속옷도 대충 입지, 불편하지만 않으면.”

 “암.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고..”

 “우리 남편은 내 속옷 본 지 석삼년은 됐어.”

 우리는 킬킬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작은 가게 안에는 단지 속옷으로서의 실용성만 강조한 단조로운 무늬의 브래이지어와 팬티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스윽 훑어보니 원단만큼은 순면 100%에 바느질이 꼼꼼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봐줄 사람이 본인밖에는 없지만 색깔도 베이지 계통에 레이스 장식도 별로 없었다. 가게 한 구석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이미 우리의 낄낄대는 대화를 들었을 뿐 아니라 둘의 몸매까지 쓰윽 훑어보고 난 게 감지되었다. 

 “구경 좀 할게요.”

 나의 말에 여자가 입가를 조금 움직이며 웃었다.

 “네.”

 “여기 있는 게 다 인가요?”

 친구가 브래지어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도 너무 단조롭지 않은가, 하는 뜻이었다.

 “예. 우리는 편한 것 위주로 갖다 놓아요.”

 편하다.. 친구와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표정을 단번에 읽은 그녀가 물었다.

 “사이즈는 어떻게 되시나요?”

 “80A를 입는데 어느 회사 것은 작고 어딘 크고...”

 친구가 말했다. 나도 비슷한 체형인데 가슴은 좀 있지만(?) 처져서 80B라 해야 되나, 80C라 해야 되나 고민하는데 여자가 갑자기 친구를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가슴께를 다시 훑어보며 말했다.

 “입어보면 돼요.”

 “여기서요?”

 우리는 작은 가게를 둘러보며 동시에 물었다. 어디 숨어있는 탈의실이라도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속옷 더미 사이로 그 흔한 전신 거울 하나 없었다. 여자가 웃으며 도리질했다.

 “옷 벗을 필요 없어요.”

 “엥?”

 하는 사이 여자는 먼저 친구의 코트 속으로 손을 넣었다.

 “엄마야.”

 친구가 놀라 몸을 움츠리자 여자가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해요.”

 말인 즉 카사노바인데 말투는 건조하기 짝이 없어서 친구의 움츠렸던 몸이 편해졌다. 그 후로 여자의 손길이 친구의 옷 속에서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구가 입은 카키색 코트만 열어젖히고 그 안에 입은 니트와 하프 슬립 속으로 손을 넣어 브래지어의 끈을 어깨로 빼냈다. 여자의 손에 들린 와인색 브래지어가 주인을 잃고 부끄러운 듯 더 붉어졌다. 20년 지기 친구의 브래지어를 처음 본 나로서는 태연한 척 시선을 돌렸지만 곧 다가올 자신의 횡액을 예견하며 아찔해졌다. 그렇다고 '나는 다음번에 살래...' 하는 꼼수를 썼다간 친구로부터 무슨 원망을 들을지 몰랐다. 

 “이건 등살이 솟아났을 텐데...”

 여자는 브래지어를 잽싸게 친구의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며 말했다. 친구는 혼이 나간 듯하다가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와이어를 없애도 끼더라고...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친구는 가슴이 편해졌는지 제법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사이 여자는 브래지어를 하나 골라오더니 친구를 보여주고 좀 전과는 반대 순서로 옷 속을 뒤집고 휘저었다. 후크까지 채우고 옷들을 다시 꿰어 넣은 후 코트를 탁탁 털어주는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입으로만 말했다.

 ‘무지 편해.’

 그건 '나만 사면 안 되지!' 하는 은밀하고도 확고한 엄포였다.  

 여자가 나를 향해 섰다. 그녀는 이미 내 몸을 스캔한 후 치수를 읽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등에 후크가 없는 스포츠 브라를 한 게 생각이 났다.  

 “난 스포츠 브라를 해서... 벗을 수가...”

 어쩌면 여자가 내 몸을 더듬는 일은 없을 거라는 요행을 바라며 더듬거렸다. 여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얇은 패딩의 지퍼를 내렸다. 여자는 먼저 패딩의 소매를 벗기고 그 안의 옷들을 왼쪽 오른쪽 어깨로 뺀 후 스포츠 브라를 목으로 올려 머리로 뺐다. 도대체 몇 겹의 옷 속에서 순식 간에 벌어지는 일들이 믿기지 않아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능란한 소매치기가 옷깃 하나 스치지 않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가기라도 하듯 그녀는 나의 팔을 제외한 살갗 하나 스치지 않고 아침에 드라이한 머리도 건드리지 않은 채 옷을 벗긴 것이다. 그 모든 동작이 옷들에 가려져 밖에서도 안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왜 가게에 탈의실은커녕 휘장조차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의 검은색 스포츠 브라가 어느새 여자의 손에 들려있었다. 마치 겨드랑이에서 비둘기라도 뽑아낸 마술사의 손 같았다. 

 “이렇게 늘어져 있으니 가슴을 받쳐주지 못하지... ”

 여자는 비둘기를 날리는 대신 브래지어의 늘어난 밴드를 잡아보더니 내 패딩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어느 날 속옷 가게에 들르니 여자가 웬 처녀를 붙들고 화려한 손동작을 시전하고 있었다. 처녀의 얼굴은 발그스름해져 있었고 그 옆에는 엄마인 듯한 여인이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은 필시 이 집 단골이고 엄마를 따라온 딸은 아마도 아직 뜨밤을 지낼 남친이 없어 보였다. 뜨거운 밤을 꿈꾼 남친에게 너무 편하기만 한 속옷을 입은 여친은 자칫 엄마나 누이를 떠올리기 십상이라 자칫 뜨뜻미지근한 밤이 되지 않겠는가. 

 친구가 처녀를 보면서 속삭였다.

 “아직은 이 집 단골이 되기에 좀 이르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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