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업식 방송 화면에 내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적혀있다. 아이들이 시선이 느껴진다. 수십 개의 눈동자에 혼란, 애절함, 호기심이 그득그득 담겼다. 칭찬과 과분한 사랑이 어색한 선생님은 괜히 센 척을 해본다.
“에이, 끝날 때 말하려고 했는데 벌써 나와버렸네.”
연주가 울기 시작했다. 연주는 어제부터 눈가가 촉촉해지곤 했다. 휴지를 연주 책상 앞에 갖다 놓는 사이 다른 아이들도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울음바다가 펼쳐졌다. 과연 저학년 교실이다. 누군가 날 위해 울어준다니 감동적이지만 담임의 입장에서는 다른 부분이 신경 쓰인다.
눈가를 훔치는 은지부터 살펴보자. 은지가 울 때 어떤 표정인지를 똑똑히 기억하건대 저건 억지 울음이다. 인상을 써가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호준이 역시 시무룩한 연기 중이다. 가만 보니 교실의 절반 정도는 억지로 눈물을 짜내고 있다.
데일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말한다. 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오랜 세월 살아남은 이유는 인간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아이들 역시 사랑받을 수 있는 어린이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활짝 웃으며 달려가는 어린이는 예쁘지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5분 늦으셨네요, 지적하는 아이는 달갑지 않은 법이다.
아이들이 사랑을 갈구하게 된 데에 내 책임은 없을까. 1년 동안의 교육을 돌아보았다. 울먹이는 연주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준 게 다른 학생들에겐 압력을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반성하다 말고 이내 냉정해졌다. 아니, 그게 당연한 거지. 나에게 살갑게 구는 사람한테 더 친절한 건 인간의 본능이잖아. 얘들도 세상 살아가려면 이 정도는 겪어 봐야지.
합리화를 끝내고 후련한 마음으로 1년 동안 배웠던 동요 중 신청곡을 받아 함께 불렀다. 아이들이 가사처럼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꿈을 꾸고, 도전하고, 희망과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현실에 막혀 포기해야 하는 무언가가 너무 많지는 않았으면.
칭찬이 독이 될까 봐 아이들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다. 수학 문제를 어려워하는 친구를 군말 없이 도와주던 너희들은, 공책 한 권만 선물로 주어도 얼굴빛이 환해지며 감사하다고 외치던 너희들은, 모둠별로 모여 학습게임에 열중하던 너희들은 내 가슴을 녹이곤 했다. 반짝이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학기를 마무리할 때면 악수, 하이파이브, 포옹 중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인사를 시켰다. 선생님의 마음으로는 모두와 진한 포옹을 하고 싶지만 그건 일방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니까. 실제로 매일 교실에 남아 수학을 가르치며 고군분투했던 재훈이는 제대로 된 눈맞춤도 없이 손바닥을 후리고는 쌩하니 달려 나갔다. 뉴스 같은 데서 보면 선생님의 사랑으로 감화된 사고뭉치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 내심 기대했건만 어림도 없었다.
마침내 교실에 나만 남았다. 홀로 남은 선생님이 물끄러미 책걸상을 바라보는 이유는 청소가 막막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마지막 아이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배로 아련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오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재판 판결을 보건대 한숨만 쉬어도 아동학대로 고소당하고, 늘봄에 교실을 빼앗겨 보충수업은 꿈도 못 꿀 확률이 높아 보였다. 벌써 작년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는 않으려 한다. 추억은 추억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 굳이 내용물을 깨서 확인해보려 들지 말고 단단하게 굳혀서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벽돌로 쓸 때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주책을 그만둘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얘들아 안녕. 희망을 꿈꾸는 어린이가 되어야 해. 선생님도 씩씩해져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