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맥주와 가을 산책과 소풍과 꿀 탄 커피와 낮잠을 사랑하는 취향
어제는 오랜만에 잠을 잘 잤다. 요즘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과, <나는 왜 사랑할수록 불안해질까>라는 책을 읽고 있다. 여기 브런치에는 내가 힘들었을때의 일기가 많이 적혀있어서 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평소의 나는 생각보다 제법 안정적이다. 해야할 일과 하지 않았으면 할 일을 빠르게 구분하고 할 일 하고 치우고. 배우고 싶은 것들은 배우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적어둔다. 요즘은 좋은 스승이 많아 좋다.
지난주부터 ‘번아웃’을 배웠고 적극적으로 타계책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내 나름대로 글을 놓지 않고 그러나 부담스럽지도 않고.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잘”하거나 돈값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없이 그냥 생각을 안전하게 풀어놓고 공유하고 지지받는 정도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에는 역시 브런치가 제법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어제 쓴 것을 오랜만에 올리고 가만히 느낌을 느껴보았다. 오랜만에 두근거림이 싫지 않았다. 누가 나를 평가할거라는 생각보다 ‘오 보고 비슷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지. 누군가가 좋아요도 누르네! 더 좋군.’하는 마음에 잘 잤다.
그래서 당분간은 “좋았다” 일기를 써보기로.
오늘 좋았던 것은
- 가을 소풍이 좋았다
- 내가 맥주와 커피를 많이 마시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 잠을 잘 잤다
- 핫도그 존맛탱
- 생각보다 클래식 음악이 좋구나!
- 요즘은 유튜브든 책이든 좋은 스승이 많아서 좋다
정도?
올 한해는 많이 걸었다. 5월부터는 거의 매일 운동을 했다. 3월부터는 사이클을 탔고 날 풀린 뒤에는 청계천을 아주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면서 걸었다. 나는 좀 기질적으로 예민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예고 없이 혹은 모르는 길에 접어들면 잘 당황한다. 당황하면 즐겁다기 보다 패닉해서 얼른 도망가고 싶어한다. (의외로 mbti는 Entp고 기질 검사에는 자극추구가 거의 100이다. 그냥 겁이 많고 내 의지로 통제 안되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뿐)
겨우 길 모르는 것이 왜 문제냐 싶을 수 있지만 모르는 길에 가면 개인적으로는 길을 즐길 여유 없이 때 되면 돌아와야 하는 것과 돌아오지 못했을때 끝내지 못한 일이 떠오르고 겨우 길하나 못 찾은 것이 창피해진다. 그래서 애초에 모르는 길로는 좀 잘 안가고 익숙해질때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주 조금씩 머무는 시간을 늘린다. 그러면 간 길만큼은 익숙해져서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꽃도 보고, 사람들도 보고, 여유되면 조금 더 가보기도 하고. 피곤한 날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도 오고.
한창 운동을 많이 할때는 종종 행복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쾌했고 그냥 걸으니 여름날의 풍경도 바람도 그냥 좋다. 오 좋은데! 행복이 별게 아닌데? 하고 돌아와서 오늘 그정도 운동만 해낸 나라도 사랑해! 하고 잘 재워주었다.
행복이 별게 아니군.
올해는 그거 하나 배운 것만으로 큰 가치가 있었다. 여름쯤부터는 고민에 휩싸였다.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머리가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하는 걱정을 했다. 아무래도 치료를 좀 오래 받기도 했고, 기분 장애는 이상하게 약간 나아질만하면 ‘아 생각보다 빨리 안 낫네? 나 나약함? 아, 좀 더 빨리 나아지면 좋을 것 같은데?’ 하면서 약간 스스로를 다그치는데 보통 높은 확률로 그러면 덧나기 쉽다. 조금 뛰어보려다 된통 넘어져서 다리 부러지는 일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아, 나는 안될 사람이네’ 하고 다시 치료가 원점으로 돌아간다.
지금 딱 그때인거 같아서 의식적으로 1) 안 다그치기 2) 생산적인 일 못한다고 채근하지 않기 3) 쓰레기통 비우기 훈련 중이다.
요즘 부쩍 기억력이 나빠졌‘었’다.
나는 인지가 떨어지면 제일 먼저 길을 잘 잃고 숫자 계산 능력이 떨어진다. 6+7이 뭐지..? 70%가 얼마더라? 이런 말이 입밖에 나오면 이제 아 오케 내가 머리를 다 썼군 하고 치우면 되는데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이 끼어든다. 아 나 머리쓰는 직업인데, 내가 실수하면 어쩌지? 언제까지 심해지는거지? 뭐 이런 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할 방법을 찾고 싶지만 생각이 많도록 훈련된 지식 노동자에게 의식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말라’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때 내가 제일 잘 써먹는 것은 ‘보류’다.
에너지를 다 썼다고 인정하고 빠르게 자리를 떠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프리랜서이고 소속된 곳이 다양하다보니 내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에너지 보존이 잘 되지는 않는다. 그러다보니 일 하는 날은 커피를, 일 쉬는 날은 맥주를 참 많이 먹더라.
원래도 물 비린내를 잘 맡아서 물을 잘 안 먹는 습관이 있다. 냄새에 예민한 사람들은 컵에서 나는 냄새를 잘 맡는 편인데 나는 청소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라서 내집 컵에서 나는 냄새, 남의 집 컵에서 나는 냄새, 다 같이 좀 싫어한다. 그래서 일회용 컵을 쓰거나, 물 대신 음료를 마시거나 하는편이다.
지난 달에는 유독 물을 안 먹었는지 친구, 가족들 모두 “너 너무 커피를 많이 먹는다. 혹은 식사때마다 맥주나 와인을 먹는 습관은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지난 달에는 에너지가 좀 없어서 엥? 나 원래 커피 좋아하고 쉬는 날 한끼 가볍게 맥주 왜 안되는거임? 하고 훅 기분이 별로였는데
오늘 책을 읽다가 문득,
“의존”에 대한 문구를 봤다.
세련된 의존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댄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자존감이 강하다고 해서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 다음 문구로는 세련된 의존의 조건과 그렇지 않은 의존에 대해서 적혀있었다. 그 밑에 내가 아, 내가 지금 의존을 하고 있고 ‘중독’을 경계하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수면제를 먹고 자면 바로 자면 다행인데, 평소보다 컨디션이 안좋을 때 약간 더 우울할때, 조금 더 불안할때. 먹고도 못자는 경우가 있고 그냥 못자면 다행인데 다음날-다다음날을 넘어 3일 정도 지나면 기진맥진해져서 복용량이 는다. 아침에 나른한 기분이 드니까 카페인을 먹어서 정신을 차리려 하고, 그렇게 주중을 보내면 긴장도가 높으니까 쉬는 날은 의식적으로 릴렉스 되는 술을 찾고. 아마 이런 사이클로 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영양제를 꼭 챙겨먹는다.
마그네슘은 불면에 좋고, 유산균, 실리마린. 비타민 B는 피로, D는 기분 회복, C는 컨디션. 오메가는 머리를 위해 챙겨먹는다. 몇 달 제법 안정적이었는데 요즘 피곤한 걸보니 추워서 운동이 줄었구나! 그래서 지금 도파민이 안나오나보네! 그렇다면 세련된 의존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하다가 오늘은 소풍을 갔다. 다시 운동에 익숙해지기 & 추운 날씨에 무리하게 뭔갈해서 일하는 날의 컨디션을 망치지 않기. 1타 2피를 위한!
집 앞에 맛있는 칼국수 집에 가서 뜨근한 칼국수를 먹고 좋아하는 예쁜 옷을 입고 카페인 덜한 드립 커피에 꿀을 약간 담고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맥주도 하나 사서 물가에 가서 책을 읽었다. 클래식 음악도 좀 듣고, 전 같으면 ”야! 일단 ‘중독’은 다 나빠!!!! 오늘부터 커피 끊어! 맥주 끊어!“하고 또 한 며칠 또 불안과 우울이 과중된 밤을 보냈을거 같은데 요즘은 호르몬에 대한 책을 좀 보다보니 “선호-집중-의존-경계-중독” 이 순서로 사람이 굴러간다는 생각을 했고, 의존까지는 봐주기로 했다.
선호 - 집중까지는 사랑이니까.
사랑이 없는 삶. 얼마나 지루한가. 그래서 뭐, ‘경계’ 단계 아래는 세련된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나는 맥주와 가을 산책과 소풍과 꿀 탄 커피와 낮잠을 사랑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
그거 하면 잠을 잘 자는 세련된 취향을 가진 사람!
아하하 오늘 쉬는 날인데 조금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