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미 커피와 여행이라는 환상

02 로드 무비 한 편 뚝딱! 좋았다 일기 2

by 정혜원

여기는 일본 한 백화점 3층 마루미 커피. 나는 카페라떼와 아쌈티로 만든 케이크를 먹고 있다. 다들 게이샤 커피를 먹어보라고 했는데. 왠지 그냥 카페라떼가 먹고 싶었다. (원래는 굉장히 진한, 아메리카노보다는 롱블랙. 이런거 마신다) 날씨가 쌀쌀하다.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고 적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첫눈 겸 폭설이 왔다. 나는 일본어라고는 “나마비루 쿠다시이”까지 밖에 할 줄 모르면서 오타루 가는 버스도 타고 왓카나이가는 신칸센, 삿포로로 다시 돌아오는 버스까지. 용기있게 예매해서 일본 동쪽 끝 로망을 이루고 돌아왔다.


제일 좋았던 곳은 신칸센과 버스 안이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할때 버스나 기차 여행을 훌쩍 잘 가고는 하는데. 혼자 방에서 생각을 정리하면 아무래도 감상적인 기분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기차나 버스는 일단 다른 사람들이 많고, 그런데 집중하지는 않아도 되고. 익명이고, 그런데 다들 자기 할일을 하고. 딱 내가 원하는 정도의 소속감과 익명성을 함께 채워준다. 그럼 나는 주로 뭘 하느냐? 노트 패드 하나를 꺼내놓고.


1. 내가 할 수 있는 것

2. 할 수 없는 것

3. 원하는데 할 수 있는 것

4. 원하는데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

5. 원하는데 하면 안되는 것

6. 원하지 않는데 해야 하는 것

7. 원하지 않고,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8. 원하지 않고, 내 삶에서 벌어지면 안되는 것.


이런거 적어놓고, 하나씩 분류해서 지운다. 예를 들면 ‘여행하는 동안 눈이 오길 바란다’는 4번이다. 내가 원하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외부의 자연 현상. 그런데 눈이 오면 1-8에 하나씩 꼬리를 물고 한 줄씩이 따라오는데, 가령 이런 것이다.

1. 캐리어에 우산 챙기기

2. 눈이 오게 하기

3. 우산을 뭐 챙길까 고민하기

4. 비 대신 눈 오게 하기 (일기예보에는 눈 or 비라고 적혀있음)

5. 비는 안 왔으면 하고 부정적 생각하기

6. 혹시 비가 올 수도 있으니까 옷 따뜻하게 챙기기.

7. 부정적인 생각으로 여행 망치기

8. 눈 와서 갇히기/ 혹은 비 맞아서 아프기




연말이 되면, 괜히 한 해 동안의 삶을 점검해보고 싶어진다. 올해 잘한 것과 아쉬운 것. 내년에 또 해야할 것. 올해로 끝낼 악습. 위에는 비와 눈으로 예시를 들었지만 요즘 내가 가장 고민하는 것은 여느 30대가 그렇듯 인간관계와 자아에 대한 것이다.

- 어떻게 살면 좀 편안은 모르겠지만, 덜 고난스러울까?

- 나는 뭘 좋아하고 싫어하지?

- 어떤 사람들이랑 있고 싶지?

- 나 스스로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고 있나?

- 지금 하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있나?


이런 질문은 아무래도 추상적이고 대안을 세우기에는 난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거다. 풀려고 하면 머리 더 복잡한. 그래서 하는 분류작업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타인이 해줘야 하는 것. 내가 바라도 되는 것. 타인이 개입해야 하는 것. 뭐 이런거다. 내 범위를 정확히 알고 과감하게 끊어내면 좀 덜 불안하니까.


왓카나이에 가고 돌아오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1) 최악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생각보다 최악이 아니다.

2) 최선이라고 믿었던 것들도 썩 최선이 아닐 수 있다.

3) 계획없는 삶은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 마구잡이로 섞어놓는다.


이것들이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제일 중요한 교훈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왓카나이에서 돌아오는 버스 편을 야간버스로 예매하고 싶었지만, 매진이라 하지 못하고 갔다. 왓카나이에서 삿포로로 돌아오는데는 약 5~6시간. 삿포로까지 가서 하루를 버스 안에서만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매진 표는 어쩔 수 없으니까 낮 버스를 대안으로 예매했다. 혹시 취소표가 날 수 있으니 예매 취소 규정을 꼼꼼히 보고


도착하자마자 아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연 가게가 단 한 군데도 없었던 것. (아무래도 시골 마을이니까) 심지어 식당조차도. 딱 한군데 찾아낸 식당은 오므라이스와 카레를 전문으로 하고 맥주는 안 파는. 카드 안 받는 그런 식당이었다. 난 카레를 싫어한다. 그 특유의 향이 싫고, 맥주 없이는 저녁 밥을 잘 안 먹고.. 주머니에는 혹시 몰라 뽑아놓은 10000엔 지폐 하나 덜렁 있었는데 그때! 케이블 라인 꽁다리가 핸드폰에 꽂힌채 부러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ㅈ됐다...
실화냐고…

급히 손톱으로 핸드폰 안에 박힌 8핀을 잡아뺐는데 다행히 핸드폰이 고장나지는 않았다. 대신 여행 내내 보조 배터리를 연결하면 복불복으로 어떤 때는 충전이 되고 어떨때는 안되는 멋진 사태가 벌어졌다. 어찌어찌 택시를 잡아서 노샤푸 곶으로 향하는데, 기사 언니(여자분이셨음)가 일본어로 아주 길게 뭐라고 자꾸 말을 걸기 시작하더니 버스 스탑을 보여주고 드라이브를 시켜주었다. 사무이 사무이. 키레! 칸코쿠진. 히어. 웨잇. (알아들은건 키레 뿐)


신종 요금 올리기 수법 같은건가? 하고 내렸는데 기사 언니가 안가고 한참 서있더니 내가 사진을 계속 찍자 결국 떠났다. 휴~ 일본 사람들은 친절한데 약간 과하네.. 하고 있던 찰나. 구글맵을 켜니 서비스 지역이 아니라서 택시를 부를 수 없었고 곶 옆의 데스크에 가니 여긴 택시가 없다는 말...! 아, 아까 기사 언니가 한 말이 이거구나? 깨달았다. 알고보니 “아, 이 친구야. 여기 택시가 없고. 넌 돌아올 방법이 없는데 험하니까 내가 너 사진 다찍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호텔로 태워주마. 아니면 여기 버스 정류장 하나 있으니까 그거 차 끊기기 전에! 바로 여기! (그 드라이브 경로) 여기에서 버스 타고 돌아오렴”의 뜻이었다.


아하하하하...


그리고 여기는 일본 동쪽 끝이라 16시에 버스가 끊기고... 시간은 15시 35분 이었다. 일몰을 보러갔는데 카메라 배터리가 추위에 꺼지지 않았으면 일본 동쪽 끝에서 사슴들과 길치에 야맹증 있는 나는... 객사했을 것이다.


결국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니 이제 카드 결제가 막혔다. 어찌저찌 하루 치를 현금결제하고 한 숨 돌리는데 우울했다. 이게 뭐야아ㅏㅏㅏ.. 왜 이러는거야... 한기와 슬픔이 몰려왔고 욕탕이고 뭐고 나가기 싫었는데.


그래도 여기 노천탕이 유명하다잖아.


노천탕은 해봐야지. 땅끝 하늘은 어떤가 어디 한번 보자! 하고 올라간 꼭대기 노천탕에서 천국을 발견했다. 진눈깨비가 오고. 별은 쏟아지고. 날은 춥고. 탕에는 나뿐이고. 벗은 몸에는 한기가. 물에 담근 반대쪽 몸에는 온기가.

여기가 바로 그 세상의 동쪽 끝이다

아!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한 삼십분 벗고 누워있으니. 아, 여기 오토바이인들의 천국이라더니. 내가 운전할 줄 알았다면 굉장히 좋아했겠다. 운전을 배워서 다시 오면 되지. 여유가 돌아왔다. 저녁이 되니 호텔에서는 식당이 근처에 없다며 무료 라멘을 끓여서 나눠주었다. 소유 라멘? 깔끔한 라멘 맛이었는데 속이 풀리니 마음이 노곤해졌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버스 표를 예매하려고 보니. 야간 버스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천만다행!


여기, 생각해보니 ATM도 없고, 카페도 하다못해 호텔에서도 카드 결제가 안되는데 어디가서 밤까지 있어...? 낮 버스여서 천만다행이었잖아...? 하며 최악이 최악이 아니었다는 것과 최선도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고 낮 버스에서 환상적인 풍경을 다섯시간 내리 마주했다. 나는 신칸센이 진짜 멋진 풍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본 동쪽 해안선을 다섯시간동안 1인 좌석으로 천천히 달리는 버스가 반값으로 더 멋진 광경을 선물해줄 줄이야. 생각도 충분히 정리하고, 와이파이 해서 일도 충분히 하고. 가격은 반 값. 자면서 돌아왔으면 하지 못했을 생각과 보지 못했을 풍경을 가득 채워 삿포로에 다시 돌아오니 호텔 옆에서 일루미네이션 축제?를 하고 있었다.


공원을 가득 채운 고구마 냄새와
가을의 정취. 은행나무 공원.

예쁘더라.


충분히 보고 돌아와, 오늘은 일본식 그 치킨? 쟌기? 그걸 먹고 자려했는데 다시 스스키노까지 갈 힘이 나지 않아서 바로 옆 이자카야에 갔다. 오타니가 나오는 야구TV, 야키도리. 생맥. 모두 진짜 일본 만화속 풍경 그대로 잖아! 다시 행복이 충전되어서 잘 잤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쟌기 본점이

바로 숙소에서 5분거리였다는 걸 알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행을 너무 오래 쉬었더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걸 잘 즐기는지. 새로운 곳에 가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일본은 그래서 뭘 보고 싶은지 완전히 모른 내 탓이었다.

홋카이도는 우유 제품이 특히 맛있었다.

종종 또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