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나 쟤 좋아함?

03. 쟤(=운동)

by 정혜원
한국에 돌아오니 한 계절을 번 느낌이다.


분명 지난주에 한참 눈을 맞다 왔는데, 낙엽이 가득하고 길거리에는 고소한 냄새가 난다. 군고구마!!! 조아!

가을은 참 색이 알록달록 예쁘다.

나는 서류 마감을 하나 마치고 미팅 자료를 추합하고 새로 논문 심사위원이 좀 되어서 그거 읽다가 해지기 전에 뛰러 나왔다.


요즘 내가 빠져있는 것은 이 해질녘의 정취다. 아무래도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다보니 하루에 내 나름대로는 출퇴근 시간을 정해놓고 “이때 출근! 이때 퇴근!” 하는 마음을 먹지만 당일 해야 하는 일이 많거나 좀 재미가 나서 빠져버리면 해진 지도 모르고 하루가 가버리고는 하는데 올해는 집안에 ‘Closed, Open‘ 팻말이라도 걸어서 나 스스로에게 이제 퇴근했으면 뭐 더 하지 말고 에너지를 챙겨라!’는 말을 적어놓아야겠다 생각을 했고.


아무래도 집안에 저 명패를 걸어놓자니 좀 웃겨서...


오후 5시쯤 알람을 맞춰두고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뛰러갔다왔다. 물론 저속 노화식단이 유행이라지만, 내가 빠져있는 것은 운동 후 라면+월드콘 조합이다. 나트륨과 정제 탄수화물... 그것은 뭐랄까... 도파민을 폭발 시켜준달까... 내일이 수능이라 학생들이 길거리에 많이 나와있었다.


행복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컵라면 하나 물을 붓고, 한숨 푹.

소세지 하나 집어 먹고 또 한숨 푹.


아고, 어린 친구들이 고생이 참 많구나. 하다가 돌아와서 브런치를 쓴다. 나는 고속 노화 식단을 좋아한다. 맥주, 정제 탄수화물, 커피, 과자는 별로 안 좋아하고 과일. ‘동안’의 필수 요소라는 것들은 사실 별로 신경쓰지 않고 지내고 올해는 서른 세살 다운 정장 입고 찍은 증명사진이 필요한 자리가 생겨서 (게다가 동안으로 나오면 안된다고 해서...) 정말 각잡고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진을 찍고 왔다. (으악! 부끄러워)


운동을 왜 좋아하지?


내가 운동을 좋아하게 된 것은 작년 올해 뛰는 기분이 상쾌하다고 생각했던 찰나들이 모여서 ‘아, 어쩔 수 없다 나 운동을 좋아함’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내 평생에 내 입으로 ‘나는 운동을 좋아함’이라고 생각하게 될 날이 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pos_ws.png (나는 와식인간이다. 24시간 중에 20시간 정도는 누워있어도 허리 안 아픔)

나의 삶은 늘 10대때보다는 20대, 20대 보다는 30대. 한 차례도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 없이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 더 편안했다.


어떡하지? 할 수 없지!


물론 사람인지라 내 102030을 생각해보면 이불 차는 순간들이 허다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가 전에도 적었지만 나는 나를 아는데, 안해서 후회한 일은 없고 했는데 조금 병신 같았던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 덜 병신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다 그때의 어린 날이 있었기 때문인 걸. 후회한다고 뭐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그때는 그게 엄청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했을 것이다. 슬프지만 잘 책임져보자가 내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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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다가오면 꼭 교복입었던 어린 날의 나와 내 친구들을 떠올린다.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불행과 더 큰 불행이 있을것 같아서 압박감에 떨었던 날들. ‘대학 못 가면 어떡하지? 실패한 인생이 되면 어떡하지? 좋은 어른이 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핫초코 하나 들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소공원을 몇바퀴나 돌았던가.


(나는 수능을 폭망했음)


가채점 표를 들고 도저히 집에 갈 엄두가 안나서 엉엉 울고 있다가 편의점에서 막걸리를 샀다. 술을 그날 처음 먹어보는 거였고 너무 울었고, 채점하다가 그대로 외투 안 입고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하고 나와서 추워 죽겠더라. 난 드라마 광인이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어른들이 그럴때 술을 마시길래. 왠지 기분에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소주랑 맥주는 19살한테 안 팔거 같았고... ‘막걸리는 으른의 술(아저씨의 술)이니까 신분증 검사 안하겠지?’와 왠지 ‘우유 색깔이니까 맛이 좀 괜찮겠지?’ 생각 반반으로 호기롭게 사서 공원에서 원샷 때렸다.


와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람...


처음 먹어본 으른의 음료는 아주 이상한 맛이었다. 쌀 비린내, 텁텁함, 시큼함. 알콜의 떨떠름한 맛. ‘이게 맞아?’ 하면서도 추워서 홀짝홀짝 다 먹으며 우는데 나보다 수능을 더 못친 친구가 공원으로 나를 데리러왔다. “야, 꼬장 부리지 말고 집에 돌아가라. 너희 부모님이 너를 수능 좀 못봤다고 죽일리 없다. 그랬으면 19년을 이렇게 곱게 안 키우셨을거다.” 혼내던 기억과 눈이 왔던 정시쯤. 그네 타고 한참 앉아있는데 자기는 재수학원 가게 됐다고 “내년에 보자!” 하고 들어가던 뒷모습.


물론 나는 어떻게 그해 대학을 갔는데.


그 정시날 "나 문창과랑 연극영화과 써보려고. 드라마가 좀 재밌었던 것 같아. 나 문학시간만 재밌었단 말이야." 하고 내가 조잘대니까 눈이 온다고 “너 속눈썹에 눈이 붙었다. 문학시간에 우리 그 여자네 집 그 소설에 여자가 속눈썹에 눈이 내렸다고 적혀있었잖아. 나 그거 틀렸는데. 이런 지문이었구나?”하고 떼어주며 웃던게 기억이 났다.


그 후로 눈이 내리면 나는 종종 <그 여자네 집>이라는 소설 속 지문을 떠올리는데. 물론 그 소설 속 여자는 불행해졌지만. 그 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 노인이 되지만, 나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값을 채워가는 것만 같아 기뻤다는 말을 남겨놓고 싶었다.


나의 시간, 행동, 노력에 정당한 값어치가 붙는 것.


청소년기에는 성적이라는 채점표가 붙어서 누가 그 값을 잘 치렀는지 꼭 같은 평가, 같은 결과를 받다가 어른이 되니 내 삶의 성적표를 빼곡히 내가 원하는 것들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잘 못하면 호되게 혼남) 그리고 저때 “너라면 잘 할거 같아 너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했던 말은 내 인생을 참 오래 따듯하게 해줬고. 궁금하다 네 책! 내가 꼭 사서 볼게! 하고 응원해주던 것도 기억이 나고.


그 후로도 나는 '아, 나는 이걸 좋아하는군'의 과정들과, 너라면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걸 잘하려고 노력하는 네가 좋다'는 좋은 어른들과 친구들을 만나서, '너의 이런 모습을 정말 좋아해'라고 말해주는 팬들도 생기고, 올해는 내가 처음 냈던 그 논문지의 심사위원도 되어보고. 남들은 어떤 걸 좋아하나 제일 빨리 보고. (최고!!!)


막연히 '아, 영어로 대사 디렉팅을 해야하는데, 수능 영어랑 교환학생때 영어로는 좀 짜치는데?' 하고 배워서 딴 영어 통번역 자격증은 이번에 나를 국제 학술대회 발표자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에는 참 지날수록 흥미로운 과정들이 수능 말고도 빼곡하게 많다는 것을 적어놓고 싶었다.


물론, 수험생 친구들.


모두 잘 될 것이다.


나는 그때 수능 좀 망했지만, 19살의 정혜원보다 33살의 정혜원이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수능 폭망하고 그때 처음 들어본 과의 처음 들어본 전공을 골랐지만, 나는 정말 행복했다. 그게 정말 내 것이 되어 가는 과정들. 내가 이걸 잘 모르고 선택해서 책임지느라 이 악물고 밤새우던 시간들. 공부조차도 스무살 넘고는 사실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아직도 레퍼런스라고 시리즈,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나오는대로 다 보는 것과 최신 학문 동향 읽어보는게 제일 재밌다. 잘하고 싶은 걸 끝없이 잘해보려고 공부하는 삶은 비록 치열하지만 인정도 받고 행복도 하고, 평안도 있다.


너희들도 빼곡하게 행복한 성인이 될 수 있기를.


(꿀팁은, 어차피 수능 치고 당일 가채점해봐야 뭐 썩 행복하지 않아서 그냥 잘 자고 다음 날 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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