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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도현 Nov 21. 2021

연상호는 사후세계인 지옥에 관심이 없다[넷플릭스-지옥]

넷플릭스 지옥의 철학적인 물음과 답변(스포있음)

자연재해를 연상시키는 폭우와 천둥번개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인간에게 지옥은 ‘자연재해’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호우와 천둥번개, 폭설과 산사태.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한없이 겸손해지듯, 자연재해는 언제나 그 상상을 초월합니다. 더욱이 인간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뜻하지 않은 재해를 단순한 ‘재해’로 규정할 수 없고,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의 삶만 보아도 자연재해를 바라보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재해는 곧 왕의 능력과 연결되고, 제사장의 역할이 강력하던 시기만 생각해도 그 무지함은 가히 인상적입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받아들여 자연을 숭배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신’이라는 존재의 탄생은 지옥이라는 알 수 없는 인간 근원적인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본디 인간은 본능적으로 더 큰 존재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오늘날 지옥의 이미지

그런데 이러한 재난과도 같은 ‘지옥’의 삶에서 변곡점이 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과학 기술의 발전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기상을 예측하고, 이를 공부할 수준의 정보를 얻으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출중한 기술력으로 정보화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과학의 발전과 정보 전달의 속도는 소위 신을 숭배하는 종교 단체와 늘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이는 서로 간의 학문적 성격이 정반대인 것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과학은 사실에 기반한 객관성이 필요하고, 종교는 상대적 진실에 기반한 믿음이 필요하니까요. 결국 사실과 진실이라는 철학적인 대립 속 서로 간의 학문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은 채 오늘의 세상을 맞이했습니다. 결국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매일 아침 날씨를 예측하고, 향후 일어날 재난을 대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서 신이라는 존재는 자연에서 특정한 인물로 바뀌었고요. 몇십 세기 이전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양상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래 인간에게 지옥이라는 이미지는 재해를 겪어야 하는 상황에서 종교적 상상의 이미지로 변했습니다.(물론 특정 지역에서 재난을 겪은 이들을 염두해야 하는 걸 알고 있기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문장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지옥’이라는 의미를 받아들이는 오늘날 인간의 이미지를 일반화시킨 표현입니다.)


그럼 오늘날 인간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지옥’의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어릴 적부터 각종 종교단체가 만들어낸 ‘지옥’의 이미지가 아닐런지요. 불구덩이와 사탄이 득실거리고 온갖 죄를 지은 인간들이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의 이미지가 아닐까요. 결국 죄지은 자가 지옥에 간다는, 언제부터인지 종교적인 의미의 지옥이 각인된.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이러한 이미지에서 시작합니다.

지옥 포스터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몇 날 며칠에 지옥에 갈 것을 알려주고, 저승인지 어딘가에서 온 고릴라 모양의 사자들이 나타나 인간을 죽도록 패고는 화형 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유히 사라지죠. 이 영화를 이해하기에 앞서 확실히 가져야 할 팩트는, 그 죽음을 예언받은 인간들에게는 어떠한 동일한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애초에 인간이 왜 그러한 사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가?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이용한 누군가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회 인식이 생기는 현상에 주목하죠. 네, 결국 연상호 감독은 ‘지옥’이라는 세계보다 남겨진 인간의 삶을 바라봅니다. 애초에 감독은 인간 삶 너머의 세계를 풀어갈 마음은 없습니다. 왜 그들이 죽는지 조차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이용한 인간의 욕심과 죄악에 대한 물음을 남길뿐이죠.


이 작품은 연상호 감독의 첫 단편 애니메이션을 웹툰화하였고, 그 웹툰을 작품으로 풀어낸 드라마입니다.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느 날 어느 누군가에게 나타나 천사가 예언을 합니다. “너는 몇 날 며칠에 죽는다. 네가 죽는 시간은 몇 시이다.” 영화 속 시점은 난데없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며 초조해하는 남성에게 포커싱 됩니다. 그를 두고 조별과제가 한참인 듯 보이는 학생들은 새진리회에 대한 이야기 중이죠. 그들의 노트북 너머 유튜브 영상은 사자들에게 죽임 당하는 인간의 영상이 한창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초조한 남자는 20분이 되자 눈을 질끈 감습니다. 이내 웅장한 베이스 소리가 나고, 고릴라 같은 사자들이 창문을 깨부수며 등장합니다. 두꺼운 주먹으로 맞고 튕겨져 나간 이 남자는 도망가기 바쁘고, 사자들은 순식간에 그 남자를 따라잡습니다. 사자들의 잔인한 폭력 이후 남자는 그들에게 화형 당한 채 뼈만 남게 됩니다. 이 죽음 이후 세상은 급변합니다. 이전부터 이 사건을 예측하며 더욱 정의로울 것을 외치던 남자 정진수. 그리고 그가 이끄는 신흥 종교단체인 새진리회는 단기간 대한민국을 독점으로 이끌 만큼 거대한 세력으로 자리 잡습니다.

생방송을 준비중인 박정자씨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뭐야, 그럼 왜 인간이 죽는 거야?”가 자연스럽게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궁금증 해소를 위해 영화 속 장진수 의장은 뉴스를 통해 “인간은 평생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고, 이 사건은 그 죄를 벌하기 위한 신의 뜻”이라는 멘트를 남깁니다. 미디어는 그의 삶과 그의 말을 대서특필하죠. 세상의 모든 관심이 지옥에서 온 사자들에게 포커싱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예기치 못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두 아이의 엄마 박정자 씨가 천사로부터 죽는 날짜를 받게 된 것이죠. 장진수는 그녀의 죽음을 생중개로 공개하길 원합니다. 무려 30억을 주면서 말이죠. 장진수가 그녀의 죽음을 생방송으로 공개하길 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일반 시민들 중에서는 지옥에서 온 사자들을 믿지 않는 이 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내 생중계되는 그녀의 죽음. 지상파 방송 3사는 모두 생중계를 통해 사자들의 등장과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세상은 급변합니다. 소위 새진리회의 세상이 됩니다.


저는 사이비 종교를 표방하여 스릴감을 조성하는 작품을 즐겨보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러한 작품은 담고 있는 메시지와 뜻이 예측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 중 인물들의 연기가 오버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그들의 연기가 눈에 그려지기 때문에 그리 즐기는 장르는 아닙니다. 저 역시 이 작품의 원작이었던 웹툰을 보지 않아 몰랐습니다. 예고편을 보고 ‘지옥’이라는 연상호 감독의 세계가 펼쳐지는 서사극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작품은 사이비 종교를 기점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고발극이었으며, 연상호의 세계는 제 생각보다 더욱 디스토피아적이었습니다.

지옥의 사자들

먼저 우리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지옥에서 나타난 사자라는 것이 미디어와 새진리회가 만들어낸 프레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사자들의 정체에 대해 객관적 사실을 밝혀내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장진수 의장을 통해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의 뜻을 받고 나타난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측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내 사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죄지은 자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힙니다.   생방송으로 죽임 당한 박정자  역시 뚜렷한 죄가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추측함으로써 그녀를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미디어는 그녀의 죄명을 제멋대로 ‘미혼모 칭하고,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자들에 의해 죽은 그녀는  이상 말이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는 우리까지 “.. 미혼모가  중에서는 죄인이구나.. 혹은 박정자 씨가 죄를 지었던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숨기고 있는 거구나..”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녀가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보다는, 그녀 죽음의 정당성을 만들어야 했던 새진리회의 의장으로서 그녀의 죽음이 상당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죄인이 죽어야 하니까요. 더 정확히는 죄인만 죽어야하죠.


앞서 저는 오늘 시대를 이야기하며 정보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는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속도와 양에 있어 질적인 차이가 달라졌죠. 손가락  번이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습득할  있으며, 이전에는 상상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를 자랑합니다. 이는 분명한 장점이 존재함과 동시에 분명한 단점도 생겨났습니다. 우선 우리는 정보전달의 속도와 양이 질적인 면에서 뛰어나게 발전하여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양의 정보를 빠르게 얻을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튜브의 발전은 기관이나 특정 단체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인물도 정보전달의  축이   있는 시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뜻하지 못한 단점을 불러옵니다. 바로 정보의 정확성 문제입니다. 기자들은 [속보]라는 단어에 집착하고, 유튜브는 실시간 트렌드를 만들며 속도 전쟁에 압력을 가합니다. 모두가 정확한 전달보다 빠른 전달에 집중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바로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스토리를 펼칩니다. 바로 새진리회 의장인 정진수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삽시간에 퍼진 정진수라는 인물은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되고, 언론은 비판없이 그의 교리를 전파하기 급급합니다. 새진리회가  진리이고, 앞으로의 정의가 새롭게 탄생하는 시점입니다.

극중 정진수 의장

정진수 의장은 죽습니다. 그것도 지옥의 사자들에게 죽임 당합니다. 그는 20년 전 천사로부터 예언을 받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된 지금, 세상에 나타난 그는 “더욱 정의로워라”는 말을 통해 세상을 단숨에 바꿔놓죠. 앞으로의 세상은 절대적으로 정의로워야만 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예언받은 시간이 되기 직전, 정진수 의장은 말합니다. “저는 단 한순간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언론에서는 제 과거를 들추며 정의롭고 착한 인물이었다고 말하죠.” 민주주의 사회에서 독자적 인물의 신격화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고, 각자의 개성과 의견을 존중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특권이자 권리이죠. 하지만 정진수 의장의 메시지에 주목하던 인물들은 일률적인 행동이 곧 정의가 된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실 이 죽음의 이유에는 어떠한 객관성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사회주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이 도래한 것입니다.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이러한 세상을 만들어 낸 인물로 미디어를 꼽습니다. 생각해보면 더욱 비판적이고, 사실관계를 따져야만 했던 미디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데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더 나아가 내가 지옥의 세계에 사는 인물이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공포가 만연한 시대. 언제 죽을지 모르고, 행여 내가 누군가에게 죄짓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감시하고 획일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시대. 이 시대에 자유는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자연재해의 공포 앞에서 숙연할 수밖에 없던 옛 선조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객관성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 만연한 시대. 이 시대에서 저라면 그들의 의견에 반하면서 저만의 길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럼 그 역할은 누구에게 기대야 하는 것일까요. 누군가에게 역할을 기대는 것이 맞기는 할까요.


이 작품은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작품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장면과 장면 사이에 인물들의 감정선을 전달할 시간이 없고, 오히려 극의 흐름을 위한 장면과 철학적 질문만이 난무하는 극입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이러한 연출에서 시작되었다면 이것은 작품 자체의 성격이므로 감독을 비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논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이러한 극을 선호하는 편이고, 독특한 디스토피아가 아주 잘 연출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보았습니다. 선택과 집중의 영역에서 감독의 선택이 탁월하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어떤 이는 이러한 맥락에서 연상호의 세계관에서 극을 이끌어갈 배역이 아닌 배우들은 비바리움에 그친다 라고 평하기도 하더군요. 저 역시 반은 공감하고, 반은 공감하지 못하는 평이긴 합니다. 정진수라는 인물 외에는 배우들의 연기력을 통해서 변하는 감정을 느껴야만 했고, 이것이 감독의 역량이라면 역량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절반의 이유로는 ‘만약 이 극에서 인물 간 감정선이 더 늘어났다면 이렇게나 포괄적이고 모호한 주제들이 잘 전달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남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감독의 의도는 종교와 믿음이라는 철학적인 질문들과 미디어 비평이라는 사회적인 통찰을 내비치는 것이니까요.


철학은 인류가 감당해야 하는 난제에 대한 질문. 그리고 이것을 생각하고 저마다의 답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철학에는 답이 없고, 모호한 생각만 남을 뿐입니다. 시대와 문화적 상황에서 격변하기도 하고요. 때문에 모든 인간은 살아가며 저마다의 철학을 안고 살아갑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본인의 철학을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라는 철학적 난제도 교묘하게 피해 갔죠.(분명 사이비 종교는 객관적으로 믿음의 영역 이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비판하는 장치가 되었으리라 추측합니다.) 다만 그는 이 영역을 조금 더 넓게 본 모양입니다. 종교적인 믿음을 비판할 의도는 없으나, 이것의 믿음 과정에 비판적인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나에 주목합니다. 이에 대한 무분별한 믿음을 확증시킨 장본인으로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사용했고요.

지옥의 연출자 연상호 감독

연상호 감독은 반도와 염력을 통해 그 능력을 의심받았습니다. 저 역시 연상호 감독의 영화 감독적 역량에 의문이 있기도 했습니다. 밟아도 살아는 잡초처럼 그의 필모에 대한 비판 이후 감독으로서 과한 포장력과 생명력을 꾸준히 만들어주는 언론에도 저는 회의적이었습니다. 블록버스터급 연출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나, 이를 풀어내는 방식과 전개가 너무 구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서 그가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두 작품을 거치며 너무 평가절하되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 작품은 애니메이터로써 그가 가진 장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그의 작품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철학적인 난제를 잘 풀어낸 작품도 또 없으니까요. 상업성보다 작품성에 손을 들어준 배급사인 넷플릭스에 또 한 번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전세계 넷플릭스 순위

끝으로 지옥이라는 작품을 같은 해에 개봉한 오징어 게임과 비교하는 글이 난무하는 기사를 수도 없이 많이 봅니다. 기록 깨기에 맛 들인 우리나라는 언제쯤 정신 차릴 수 있을까요. 성적이라는 지표보다 작품으로써의 비평이 더 많아야 하는 작품 같은데 말이죠. 이 또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저는 이러한 성적에 집착하는 사회적 인식에 비판적인 사람이긴 합니다. 언제까지나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 기대는 기사를 볼 수만은 없으니까요. 작품 평가의 척도가 오징어 게임인 세상이 영 찝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넷플릭스가 보다 많은 작품들에 실험성을 안겨주고, 새로운 작품과 획일적이지 않은 콘텐츠가 많은 세상을 기대합니다. 문화산업은 그러한 과정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니까요. 물론 지옥도 그러한 관점에서 문화산업 전반에 영향을 끼칠만한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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