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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도현 Oct 15. 2019

제로섬 게임 세상 속 우리는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를 읽고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엄격한 ‘제로섬(zero-sum)’게임으로 이루어져 습니다. 제로섬 게임은 이득과 손해의 합이 언제나 0 되어야 한다는 규칙이있죠. 그러니까 이것은 누군가 한쪽이 이득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손해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신호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신호에 걸렸다는 것을 의미하며, 매장에  개밖에 남지 않은 마카롱을 선택한다는  누군가의 마카롱 선택 기회를 빼앗았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득과 손해의 합이 0이라는 엄격한 제로섬 게임에 부합합니다. 그리고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제로섬 게임에서 손해를 입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습니다.


남자와 혜주 그리고 버스 운전기사

남자는 혜주를 잃었다. 그것은 새벽에 일어난 버스 사고 때문이었다. 새벽에 말도 없이 떠난 혜주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혜주를 잃은 남자의 삶은 처참했다. 혜주가 죽은 이후에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은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남자는 “왜 혜주여야만 했는가”라며 목놓아 울었다.


그러니까 남자가 “기적처럼 버스 사고에서 살아난 운전자, 회사로부터 부당해고 당해..”라는 기사를 본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원래 가야 하는 노선을 이탈하여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건만, 버스 회사 측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고를 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연이어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는 그를 응원해달라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었다. 기적. 누군가는 이유 없이 죽게 되었는데, ‘기적’ 이라니. 며칠이 지나 남자는 분노에 휩싸여 그 버스 운전기사를 무작정 찾아갔다.


허나 버스 기사를 찾아간 그는 화를 내거나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기적

남자와 버스 운전기사의 대화는 버스 운전기사의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습니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자꾸 그렇게 돼버리는 거. 기가 막히게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는다거나, 듣고 싶은 노래가 때마침 라디오에서 나온다거나, 기다린 것도 아닌데 시계가 정확히 4시 44분을 가리키기도 하고 뭐 그런 거. 그럴 때 나는 기분이 이상합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싶거든요.” 이윽고 그는 그의 동료 오경남이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내 동료 중에 오경남이가 있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부터 자꾸 버스 뒤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겁니다. 시내버스는 가야 할 노선이 정해져 있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건데 자꾸만 그 소리에 집중하다가 멈춰야 할 곳을 놓치고 지나쳐야 할 곳을 벗어났다는 겁니다. 결국 승객들은 회사에 항의했고, 한두 번 눈감아 주던 회사도 자금난 때문에 결국 오경남이를 잘랐습니다.”


그때, 나는 오경남이의 새 직장을 알아보는 것을 도와줬습니다. 근데 말이에요, 그때 나는 속으로 “나는 좀 더 버틸 수 있겠구나”라고 왜 안심했던 걸까요. 얼마 안가 버스 운전기사는 그날 그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혜주가 죽은 그 사고였다.


“근데 그게 어느 날부터 나한테도 들리는 겁니다. 오경남이가 말한 그 목소리. 그날 고속버스를 운전하던 나도 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너무도 거슬렸습니다.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세수도 하고 귀도 씻고 정신을 붙잡고 버스를 탔는데, 여전히 그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그렇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승객 한 명이 타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뒤였습니다. 부랴부랴 이전의 휴게소로 차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 승객은 없었습니다. 휴게소 직원 말로는 다른 버스를 타고 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뒷좌석에 있던 승객들이 티브이를 틀어보라고 난리인 겁니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연결한 텔레비전에서는 안개로 인한 6중 추돌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승객들은 저마다 “아빠는 괜찮아.”, “엄마? 엄마 나야. 나는 괜찮아”라며 설명하고 달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척 고요해졌다. 너무 적막한 나머지 아까 들리던 그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 질 정도였다. 버스 운전기사는 그 여자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괜찮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데도 괜찮다고 믿고 싶었다. 모두들 뜻밖에 기적에 감사하는 눈치였지만, 그것이 그 여자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지사지의 마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은 사건 사고에 노출됩니다. 그것은 제로섬 게임에 입각하는 이득과 손해의 영역의 문제이. 사고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득의 영역으로, 사고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은 손해의 영역으로 분리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득과 손해의 제로섬 게임 규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너무 쉽게 ‘기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죠.


“그들은 사고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았어.”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기적이라는 단어에 어딘가 모를 찝찝함이 돕니다. 손해의 영역에 놓였던 주인공도 ‘기적이라는 단어에 분노하죠. 기적이라는 표현 결코 틀린 표현이 니지만, 기적이라는 단어에 찝찝함을 느끼는 이유는 왜일까.




지금 내가 손해를 입지 않았지만, 언제나 이득의 영역에 놓일 것이라 자부할  있는 사람은 습니다. 어떠한 사고를 인간이 막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나 이득과 손해의 동일선상에서 출발하죠. 허나 사건 사고로부터 살아남은 우리는 당장의 상황에 안주하기 쁩니다. 그것이 죽음을 동반하는 사고가 아닐지라도 인간의 이기심이 나타나는 대목은 동일합니다. 매장에   남은 마카롱을 집을 때도, 걸리지 않는 신호를 지나갈 때도, 오경남이의 해고를 바라볼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순간 이득과 손해의 영역에서 나를 먼저 생각하니까요. 어떤 때는 내가 입지 않은 손해에 안주하고, 어떤 때는 “ 나여야만 하는지분노하기도 합니다. 애석하게도 인간은 너무 이기적인 동물이라 타인의 상황에 공감하기 이전에  안부를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허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생각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내가 처했을 수도 있는 상황들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허나 그 와중에도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라는 이유로 안주하기 바빴던 날들을 떠올려봅니다. 지금의 내가 안주할  있는 이유는 타인의 손해가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사건 너머에 있는 그들은 손해에 더욱 관심이 없다. ‘기적이라는 표현이 가져오는 찝찝함은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기적이 되는 세상. 우리는 ‘기적이라는 표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았을까. 아니, 우리는 타인의 손해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역지사지 마음은 그런 것이 닐까요.

그들의 이해관계

제로섬 게임은 언제나  합이 ‘0’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글에서 사용한 ‘제로섬 게임 잘못된 표현이었음을 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겉보기에  합이 0 부합하는  같지만, 보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합은 온전히 0   습니다.  아픔과 타인의 기쁨이 어떻게 같을  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치유해줄  있는 방법은 보다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입니다. 소설  남자를 떠올려보죠, 버스 기사가 느낀 감정과 남자가 느낀 감정은 대화를 하기 이전과 이후로 뉩니다. 남자는 분명 그에게 분노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눈 뒤에는 어떠한 분노를 표현하지 습니다. 그러니까 대화를 하기 이전에는   없었던 그것. 그것은 이해관계라는 단어로 해석될  있을 입니다. 결국 남겨진 이들을 치유할  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닐까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와, 그것으로 부터 형성되는 그들의 이해. 세상이 온전이 제로섬 게임에 놓인  같지만, 인간은 그것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으니까요. 우리가 그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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