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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특한 버라이어티 Feb 28. 2021

파란만장의 시작

공적영지 아니 비몽사몽


오후 12시 반.

눈을 떠보니 집안의 정원이었다.


정확히 말을 하자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머리맡에는 커다란 낫이 있었고 그 낫자루의 옆에는 바다거북이 한 마리가 온몸을 난자? 당한 채로 누워 있었다.


광택처리를 하여 겉 표면이 반들반들해진 바다거북의 딱딱한 등표면은 낫이 들어가지를 않아 깊지 않게 패인 자잘한 스크래치 자국만이 남아있었고, 반대편 복부 쪽으로는 여러 군데 난자를 당한 처참한 형상의 바다거북이 한 마리가 마당 풀밭에 엎어져 있었다.


그 바다거북은 원래는 집안의 거실 벽면에 걸려있어야 할 박제 장식물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

그 경계의 사이에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


신경안정제.

약물중독으로 인한 환각상태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 모습을 그냥 바라보았다.

무섭다거나 흉측하다거나 하는 느낌도 그리고 이 모습을 부모님께서 보시면 큰일 날 텐데 하는 불안의 느낌도 없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 감정이 없는 텅 빈 그저 공하다면 공하다 할 그러한 상태.


약의 기운에서는 벗어나고 있었지만 아직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의식의 준비는 되지 않았던 무의식, 무분별의 상태.


그런데 희한하다.

그 어떠한 생각도 없이 고요한 상태로 있는다는 것

깊은 선정의 끝자리에나 들어가서야 가능한 일 일터인데...

명상의 끝자리에서나 느낄 텅 빈 고요 속의 평온을 주파수 떨어뜨리는 이런 약을 하고 느끼고 있으니...

아니 그건 아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아닐 것이다.


잠도 덜 깨었고 약도 덜 깨었으니... 가수면 태에서의 침잠 아닌 침잠이라 할까?


존재의 모순을 처절히 깨우치고 그 모순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완전한 선정. 지를 이루고 사마타를 이룬 그 지복의 상태라는데 그것을 이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며 어불성설이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는 선정의 체험이 아닌 선생님 말씀처럼 같은 파사나라고 같은 파사나가 아닌 같은 사마타라고 같은 사마타가 아닌 그런 명상의 끝자리를 나는 가보지 못하였으니 정녕 모르겠다.


시공간을 완전히 놓아버린 그때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아차린다면 견성일 텐데....





마당 한편에 자리 잡은 코스모스가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마당에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잎

사이로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를 쫓아다녔다.


조심조심, 한발 한발 다가가 코스모스 꽃잎 위에 앉은 잠자리 한 마리를 드디어 손에 잡게 된  순간, 거실에 있던 전화 벨소리가 그 정적의 시간을 깨웠다.


오후 12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

당시 휴학을 하고 있던 고등학교에는 공중전화부스가 학교 정문 옆 수위실이 있는 좌측에 붙어 있었다.

집에서 싸들고 온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었을 친구가 3층 교실에서 학교 정문까지 내려와 내게 전화를 걸어준 시각.


수화기 너머로 친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하니? “


검지와 중지 사이로 날개를 잡힌 잠자리가 파드득 날갯짓을 하고 있다.

손등을 돌려 잠자리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응, 잠자리 잡았어"

"그런데 마당에 거북이가 죽어 있네..."

"거북이는 왜 또?..."

"몰라!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낫으로 찍어놨네"

"또 약했나?"

.....


잠자리의 날갯짓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잡은 잠자리를 머리 위로 손을 올려 하늘로 날려 보내며 대답했다.


"그래"

친구는 이미 내가 약물 중독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물중독뿐이 아니었다.


나는 반 고흐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VanGogh Syndrome.


그냥 간단하게 정의를 하자면 고의로 자신의 신체에 가해를 가하는 행동.


팔에 팔뚝에 수도 없는 자해를 하였다.

그러나 그에 해당되었던 행동 패턴들은 수위조절상 그냥 패스하기로 한다.


"화가 일어날 때는 그 순간 화를 일으키는 바로 그 나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문제는 거북이와 낫이 아니었다.


세상을 대하는 나의 시선에 문제가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으며 긍정적이지 못하였고 항상 불만족스러운 결핍만을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인식.


눈앞에 펼쳐져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저 보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외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상도, 대상도, 마음에 의한 것이고 보는 것도 마음에 의한 것.

모두 마음의 속성일 뿐이라지만 내 마음에 의해 펼쳐진 세상.  


내 안의 에고에 의해 내가 인식하여 끌어다 놓은 세상 속에서 마주한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처음부터 반 고흐 증후군이라는 증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행동양식의 배경에는 심한 불면증 때문에 복용하게 된 신경안정제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불면이 오게 된 그 내면에는 숨을 쉰다는 호흡 자체가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횡격막을 예리한 칼날 같은 것으로 찍어 누르는 듯한 통증을 매 순간 느끼며 밤새 잠못이루어야 했던 끊임없는 기침과 각혈이 있었다.

매일 밤낮 200ml에 가까운 각혈을 해야만 하는 결핵.

나는 폐결핵 중증 환자였다.


어느 새벽, 촛불 하나 켜놓은

그런 적막한 밤. 십 수 차례에 이르는 각혈을 한 후, 거울을 통해 바라본 내 모습은 이미

내가 아니었다.


수도 없는 각혈을 하여 입 주위가 빨개진 체로 광대뼈만이 툭 튀어나온 앙상하게 말라있는 괴물.


수척해진 육신만큼이나 영혼 또한 피폐해져 갔다.


바로 그 시기는

외부세계와의 단절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 그런 시점이었다.

2년을 휴학했던 고등학교는 자퇴를 하게 되었다.






화(ANGER), 그 분노조절장애의 시작.


그렇게 장기간으로 진행되어온 투병과 불면은 게 예민한 성격을 안겨주었고 나는 마음속에 응어리진 화를 통제하는 방법을 몰랐다.


분노의 조절이 안 되었다.

내가 만든 소통이 단절된 시간 속에서

화가 일어날 때마다 칼로 자해를 했고 담배로 화상을 만들어 내었다.


우울과 분노조절 장애. 불면증. 약물중독. 폐결핵, 그리고 반 고흐 증후군으로  이어지는

이런 멋들어진 세상의 창조.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은 약물중독 폐병환자.

그 앞에 펼쳐진 세상.


그런데... 나는 깨어있지를 못했다.


나는 나태했으며.. 나는 탐닉하였다.


깨어있지 못함은 곧 의식이 없음을 일컫는 것이었고 의식이 없는 몸은 이른바 홀릭, 중독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어 무기력에 빠진 자기 폄하적 우울.


나는 반 고흐 증후군을 앓는 약물중독자, 폐병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아상실이었다.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큰 마음의 병.

삶을 바라보는 관점조차 없었다.

목표가 있어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열망도, 간절함도 있을 텐데.

목표가 없으니 간절함도 열망도 있을 턱이 없었다.


목표가 없으니 생각도 감정도 내 인생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불면은 수많은 날들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했다.

하루하루 매일같이 새로운 날들이 나에게 다가와 주었지만 삶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갖지 못했고 느낌 또한 없이 그 소중한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내게 주어진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

하루하루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에는 의식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무엇이 잘못되어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이래도 고, 저래도 고.

존재가 형성되면서부터 끊임없이 인생을 살면서 시시각각 고가 밀려온다지만 밀려오는  

그 "고"의 파도들을 그때그때 슬기롭게 대처해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참고서나 학습법 없이 세상의 변방으로 스스로 내몰린 나는 그 미로와도 같은 어둠의 방황 속에서 어디로 어떻게 해야 벗어나게 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학원의 수강 등록을 마치고 수업을 시작하는 첫날,

선생님하고의 마찰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검정고시학원의 수강신청을 하고 수업을 듣는 첫날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개강 첫날 새로운 학원 수강생들을 두고 첫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 학원 선생의 입장에서 교실 내의 수업 분위기를 잡기 위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필 내가 그 수업 첫날,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한 제물의 희생양이 될 줄 알면서 이른 아침 지하철을 두 번씩이나 갈아타며 학원에 간 것은 아니었다.


종로에 있는 XX검정고시학원.


수업 첫날, 모두들 낯선 얼굴에 데면데면한 분위기 속에서 그저 강의실의 맨 뒷자리에 앉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터였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나서 들어온 선생은 강의실로 들어와서는 바로 프린트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일이 벌어지려고 그랬는지 그 프린트물은 강의실의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나에게까지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그런 선생의 말을 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것이었다.


그저 "프린트물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선생은 프린트물을 나눠주고 그 안의 요약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프린트물을 받지 못한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프린트물이 없다"라고 했다.


그런데 선생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을 이었다.


"왜 없어?"


(아니  왜 없냐니. 못 받았으니 없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말에 가시가 박혀 있지..

참으며 말을 이었다.)


"못 받았으니 없지요"


선생이 또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왜 못 받아?"


이번에는 참아지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대드는 소리가 나갔다.


"아니!

나한테까지 프린트물이 차례가 안 오니 못 받았지. 못 받은 게 내 잘못이야?

뭘 잘못했다고 소리를 지르고 짜증이야"


일순, 강의실의 분위기가 싸해져 가는 가운데

선생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분필이 표창처럼  날아들었고 그것을 손등으로 튕겨내는 아주 짧은 시간이  흘러갔다.


"뭐라고? 너 이 새끼 뭐라 그랬어?"


"아! 나 이런, 학교나 학원이나..

선생들 말하는 뻔새하고는.. 새끼라니 학생이 무슨 동네북이야?

못 받은 프린트물 달라는데 뭘 잘못했다고 쌍욕을 하며 이난리인데?"


재수, 삼수를 하는 나이에 고졸 검정고시 학원에 수강신청을 하고 수업에 들어온 첫날이었다.


선생은 얼굴이 누르락 붉으락 해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이리 나와!"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그냥 짐을 꾸렸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연습장과 필기류 등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짐을 꾸리고 자리를 일어나 선생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뒷문으로 강의실을 빠져나와

복도 끝에 있는 상담실로 들어갔다.


상담실의 안내 데스크에는 두 명의 직원이 앉아있었는데 그중에 처음으로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에게 말을 건네었다.


"수강료 돌려주세요, 학원 못 다니겠어요"


그 순간이었다.

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뒤돌아선 나의 뺨으로 강의실에 있었던 그 선생의 손이 날아들었다.


"찰싹"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뺨을 얻어맞은

그 날,

상담실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그 선생의 턱주가리와 함께 다 날아가버렸다.


좁은 상담실안에서 학원 선생과의 몸싸움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다만  수업료를 돌려받고자 했던 상담실에서의 그 사건은 선생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고 수업료는 이미 다 깨져버린 유리창과 선생의 코에서 터져 나오는 코피와 함께 퉁을 치게 되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게임이었다.


뻗은 주먹의 스냅을 재빨리 꺾으며 회수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하였다.

팔등이 찢어졌다.

다음번엔 잘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학원 문을 나섰다.


그때는 그랬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경기도에 있는 어느 전문고등학교로 편입, 복학을 하여 첫 등교를 한 날.


배정받은 반에는 고등학교를 3년을 꿇은 그 반의 일진이 있었고 그 일진이 불러 따라 올라간 학교의 옥상에서 그와 같이 맞담배를 피우며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오후 점심시간,

3학년 일진들에게서 허락을 받은 2학년 일진 아이들이 학급 교실의 유리창을 다 깨부수기 시작하였다.


무슨 연유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학교에서 3학년 1년을 버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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