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하얗게, 돼지국밥
가마솥에서 나는 인심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꽂히는 음식이 있다. 시커먼 뚝배기에 부글부글 끓는 국물에 넣고 이것저것 재료를 넣은 바로 국밥이다. 국물 음식이 외국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뚝배기에서 끓는다는 그 시각적인 자극, 증발되는 수증기와 함께 퍼지는 냄새, 하얗게 올라오는 김과 입천장이 될 것만 같은 뜨거운 100도씨의 온도, 한 번쯤은 위로를 받고 직장인이라면 술과 야근 스트레스에 지친 우리의 몸을 뜨끈뜨끈하게 데워주는 아주 싸고도 그야말로 가성비가 좋은 음식이다.
외국에서 챙겨간 사리곰탕면을, 국밥처럼 먹는다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보내면서도, 사실 내 국밥 사랑도 그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다. 내 고향 부산은 돼지국밥으로 유명한 곳이다. 경남 사람 중에서 돼지국밥 한 그릇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아주 위험할 정도인 사람을 제외하면 아마 없을 것이다.
돼지국밥에는 사실 왕도가 있다. 내가 먹던 부산진구의 한 버스 차고지 인근의 왕도다. 먼저 뚝배기에 나온 돼지국밥의 빨간 양념장을 국물에 섞는다. 가게에 따라서 소면을 따로 주는 것도 있고 미리 들어가 있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아이 주먹 같은 조그만 소면 한 사리를 국물에 풀어준다. 밥은 가게에 따라 따로 주는 곳도 있고 토렴 해 주는 곳도 있다. 전통적인 방식은 주로 토렴이 되어있는 밥이라고 한다. 그 밥이 잘 풀려 있는지 확인을 한 후 새우젓을 조금 넣고 간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매콤하게 무쳐진 생 부추무침을 돼지국밥 안에 넣으면 첫맛은 구수하고 끝 맛은 얼큰한, 그리고 부추의 향과 새우젓의 간이 어우러진 아주 맛있는 돼지국밥이 완성된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앞서 말한 그 버스 차고지의 바로 뒤편에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다 그 근처에는 택시 기사님들이 쉬었다 가는 휴게소도 마련되어 있었다. 버스와 택시가 드나드는 곳에는 항상 기사식당 있는 것처럼, 그 동네 주변에는 국밥집이 정말 한 가득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 급식은 정말 맛이 없어서 나와 친구들은 때때로 급식을 먹을 바에야 되지 국밥을 먹겠어라는 생각으로 자주 가는 국밥집을 찾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원래도 저렴했던 국밥 가격에 그 학교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찾아 가면 사장님은 천 원인가 2천 원을 깎아 주시곤 했다. 몸은 거의 다 큰 학생들이라 먹는 양이 적지도 않고, 국밥이라 푸는 양이 적지도 않을 텐데 학생들이 가면 꼭 소면을 두 개씩 주시고는 하던 그 사장님 덕분에 우리는 찬바람이 불 때면 꼭 방앗간을 드나드는 참새 무리처럼 국밥집을 드나들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을 때 가장 쉬운 음식은 국밥이었다. 우리 학교 주변은 부산에서 물가가 아마 가장 싼 곳이었을 것이다. 1,000원을 내면 주는 짜장면 이라던지 2,000원을 내면 먹을 수 있는 국밥 같은 것들은 당시 부산에 물가를 생각해보아도 정말 박리다매가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가격이었다. 물론 그럼 국밥에 고기가 많이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뜨거운 국물과 구수한 그 돼지고기를 우려낸 향은 겨울이 되면 골목골목을 국밥에서 나오는 김으로 가득 차게 해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 일찍 해장을 하러 가는 학생들도 함께 말이다.
취직을 하고 고향을 떠나 왔는데도 세상에 다양한 국밥을 맞고 왔는데도 부산에서 파는 언뜻 심심한 듯한 돼지국밥은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메뉴였다. 지금은 돼지국밥 만 하는 집도 많아져서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동네 국밥집의 분위기는 따라갈 수가 없다. 동네 국밥집 아줌마들이 나를 보며 딸내미가 많이 컸다고 이제 시집가야겠다고 하는 밉지만은 않은 참견과 몇십 년이 되도록 그 자리를 지켜서 이제는 사라지면 조금 슬플 거 같은 정까지. 여러 가지 추억이 담겨있기에 더욱 소중한 음식이다.
프랜차이즈 국밥집이 많이 생겨서 요즘은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국밥집은 유난히 들어가면 마음이 푸근하고. 어쩐지 잠깐 휴식을 하는 기분으로 가게 된다. 국밥집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국밥 국물을 더 주시는 아주머니께 여쭤 본 적이 있다. 이렇게 계속 국물을 더 주시면 네 집을 국밥이 거덜 나겠다고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려했다. 그러자 사장님의 말씀이 국밥은 없는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음식이니까 국물을 아끼면 될 장사도 안 된다고 누가 누구를 걱정하냐는 것이었다. 약간의 안주를 더 제공하면서 술 판매를 늘리려는 전략도 있겠지만, 국밥집에 와서 소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인심을 쓰신 것도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국밥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추위에 꽁꽁 얼어버린 손을 돼지국밥에 김에 녹이고 차가워진 몸을 국밥의 국물로 데우는 겨울이면 달에 몇 번씩은 있는 나만의 힐링. 국물이 뽀얗고 고기가 가득한 돼지국밥과 함께 나는 살아가고 있다.
사진: pixabay@709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