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대한 단상6
그날은 화이트 와인이어야 했다
한여름은, 날씨가 지독하게 덥고, 온 몸이 땀으로 끈적끈적 해지고, 불쾌지수가 최고치를 찍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하다고 다 흔쾌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날이 그랬다. 며칠째 강렬하다 못해 따갑던 햇빛에 시달리다보니 마음까지 더위를 먹어 기분이 한없이 처지기만 하던 토요일이었다. 남편과 동네에서 소소한 볼 일을 마치고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7시 즈음이었다. 충분히 '저녁'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여름날의 그 시간대가 으레 그렇듯이 사방은 환했다.
집에서 가까운 카페 거리를 지나칠 때였다. 나처럼 더위에 지쳐서 옆에서 말없이 걷던 남편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한 잔 할까?"라고 제안했고 시원한 음료 생각이 간절했던 나는 바로 오케이를 외쳤다. 바로 앞에 있던, 카페라떼가 맛있어서 종종 찾던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정면에 설치된 폴딩 도어가 활짝 열려 실내와 테라스의 온도차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테라스의 지붕이 햇빛을 가려주는 것만으로 훨씬 살만하게 느껴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생각하며 들어왔지만 주문 전 테라스석에서 저녁을 향해 달려가는 하늘을 본 순간 마음이 확 바뀌었다.
"나는 화이트 와인 마실래. 칠링한 화이트 와인."
순간, 남편의 눈도 반짝거렸고 잠시 후 우리의 테이블에는 두 잔의 화이트 와인이 놓였다.
레몬, 피망, 풀, 구스베리, 파인 애플, 열대과일. 그리고 시트러스한 느낌까지. 잔을 잡고 천천히 스월링을 하자 뉴질랜드 말보로 소비뇽 블랑 특유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살짝 적정 온도보다 차갑게 보관되어 있었던 것인지 향이 바로 다 열리지는 않았지만 워낙 더운 날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보다 풍부한 향이 잔 안을 채웠다.
사실, 글라스 와인을 주문했기 때문에 언제 오픈된 것인지, 향이 얼마나 날아갔는지, 어느 정도 품질을 가진 와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손에 화이트 와인이 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무더위를 뚫고 간간히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 살짝 어둑해져 가는 하늘. 한여름의 초저녁. 눈을 마주보고 있는 소중한 사람. 그리고 상큼한 신맛의 차가운 화이트 와인. 그 한 모금의 짜릿함. 오직 이 계절에만, 지금 이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와인이 있어서 오래 기억될 일상 속 한 컷.
어느새 하늘은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