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가 싶더니 채 즐기기도 전에 서둘러 여름이 찾아왔다. 무슨 성미가 그리도 급한지 5월부터 체감기온 30도의 열기를 내뿜더니 6월에 접어들자 그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5월과 6월의 더위는 그 결이 살짝 다르다. 5월이 건조하고 볕만 내리쬐는 '쨍한 더위'라면 6월은 슬슬 여름 특유의 습기를 머금은 '끈적이는 더위'체제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즉, 장마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를 보면 우리나라 여름은 '남동쪽에서 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오며 장마철과 한여름으로 나뉜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참으로 명쾌한 구분이 아닌가. 와인 매니아로서는 장마철과 한여름에 각각 다른 분위기의 와인을 마실 수 있으니 이모작을 하는 나라가 아님에도 한해에 여름을 두 번 즐기는 재미가 있다.
그럼 먼저 제 1의 여름, 즉 장마철에 함께하면 좋은 와인들을 만나보자.
첫번째로 만나볼 와인은 '비오는 날 웃는다'라는 뜻을 가진 '손리오 꾸안도 유에베'이다. 스페인 갈리시아 남부에 위치한 리아스 바이사스 지역의 와인으로 이 곳의 주요 품종인 '알바리뇨' 만으로 발효하여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이 와인을 이 시기에추천하는 이유는 레이블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 차릴 것이다. 이름에 어울리는 레이블은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즐거워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래서 흑백 사진에 비까지 내리고 있음에도 사진 속 사람들은 생동감 있고 경쾌해 보인다. 이들은 쏟아지는 빗 속에서 무엇을 하기에 이토록 즐거운 것일까?깔깔깔 웃음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다. 비 오는 거리로 우산 없이 나간 적이 있었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이 와인을 바라보니 어린 시절의 첨벙거림이 떠오른다.이제 쫄딱 젖으며 물장난을 칠 나이는 아니지만 그 대신 와인은 마실 수 있지 않은가. 창 밖의 빗소리와 찰랑이는 와인 한 잔.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이처럼'손리오 꾸안도 유에베'는 눅눅한 기분에 불쾌 지수가 올라가기 쉬운 장마철에레이블만으로도 기분 전환을 시켜준다. 게다가 알바리뇨 특유의 감귤, 복숭아, 사과, 망고, 파인애플 향이 주는 기분좋은 향긋함까지 즐길 수 있다.
알바리뇨는 두꺼운 껍질 덕분에 대서양에서 오는 모진 습기를 견디며 서서히 숙성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생성된 이 포도특유의 높은 산미와 짭조름한 미네랄 맛은장마철 특유의 끈적임을 시원하게 날려줄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할 와인은 뉴질랜드 '말보로'하면 바로 떠오르는 포도 품종인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티라키(Tiraki)'이다. '티라키'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 언어로 'clearing of sky'라는 뜻이다. 이는 말보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데 마오리족은 이 곳의아름다움과 광활한 자연을 기리기 위해 '하늘에 구멍이 뚫린 곳'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와인은 그 이름만으로도 자신들의 와인이 탄생한 지역에 대한 와인메이커들의 애정을 듬뿍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제 도대체 이 와인이 장마철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설'을 풀어 보겠다.아, 그에 앞서 맛에 대해 짧게 정리하면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특유의 열대과일향과 미네랄한 느낌이 잘 살아있고 적절한 산도와 과하지 않은 타닌으로 구조감도 좋은 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장마철에 장대비가 쏴아쏴아 쏟아지는 상황을 우리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라고 표현한다. 구멍이 뚫린 하늘에서는 물폭탄이 떨어질 수도 있고 햇살이 쏟아져 내려올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배우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내 인생에 내리는 비가 그친 다음에는 밝은 빛이 가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기도 한다.
이 와인은 이런 중의성을 띠고 있다. 자,레이블을 보자.
말보로의 지형과 어우러진 구름 사이로 하늘에서는비 같은 빛이 내려오고 있다. 내 기분이 비로 느끼고 싶으면 비일 것이고 빛이라 여기면 빛이 된다.
창문을 따라 흐르는 빗물에 제대로 촉촉히 젖은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비로, 일주일 내내 쏟아지는 비에 기분까지 축축해졌다면 곧 화창하게 개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상징으로 보자.
옅은 레몬빛의 상큼한 와인을 한 잔 따르고 이 레이블과 이름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면 더욱 즐거운 와인 타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비와 관련된 외국의 재미있는 와인 레이블을 구경해보려 한다. 호주와 미국, 프랑스 와인들 중에는 개성있게 'rainy day'를 표현한 와인 레이블들이 꽤 있었는데 우산을 쓴 신사부터 비구름과 무지개까지 비 오는 날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가득한, 소장 욕구를 마구 마구 불러일으키는 와인들이었다.
비 오는 창밖을 보며 우울 모드를 풀가동하여 땅을 파고 들어갈만큼 다운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또 비를 꼭 눈물이나 슬픔과 하나로 묶어 버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비가 온 후 나무와 풀들은 한 뼘 자라고 하늘에는 찬란한 무지개가 떠오른다.
6월과 7월 중순에 걸친 긴긴 비를 지나면 한여름의 태양과 열기가 반갑게 느껴진다.
언제나 보상은 달콤하다.
뜨거운 여름을 식혀줄 칠링한 스파클링 와인을 몇 배로 맛있게 느끼게 해 줄 장마철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