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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Sep 06. 2021

단편 영화 <비 내리는 날의 양자강>

뒷골목의 서늘한 감정과 풍경을 담아내는 차가운 시선

<비 내리는 날의 양자강>

2019, 차정윤 감독



해당 작품은 현재 아래 링크에서 검색하여 구매를 통해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https://purplay.co.kr/service/





풍경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제기차기를 하는 덕순(정은경)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 카메라는 인물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멀어지며 의도적으로 그녀 있는 공간을 보여준다. ‘양자강’이라는 중국집. 인파가 많은 곳도 아니고 차만 한 대씩 지나다니는 거리에 가게 하나가 우두커니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건 ‘양자강’이라는 공간에 대한 영화이다. 아니, 더 크게 보면 ‘양자강이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영화이다. 여기엔 분명 양자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인물이나 감정을 중심으로 따라가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양자강의 풍경에서 속에서, 내리는 비와 함께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 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출처 - 퍼플레이


어긋난 풍경 


이 작품에서 고집하는 연출이 있다면 그것은 카메라의 거리일 것이다. 이야기 속 인물에 이입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조차 관망하고 있다. 게다가 양자강의 옆 건물로는 단 한 번 들어갈 뿐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 작품 속에 존재하는 갈등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물론 양자강과 그 옆 건물이 성매매와 관련된 공간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양자강은 중국집이다.

출처 - 퍼플레이

왜 중국집인가. 이유 중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공권력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리라. 즉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긴장감뿐 아니라 당위를 갖는다. 결국 <비 내리는 날의 양자강>의 풍경과 인물의 행동은 이유를 담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 의문스럽거나 흥미로운 요소가 드러나며 나름의 갈등을 표현한다. 그러나 언급했듯 그것을 쉽게 알기는 힘들다. 타이틀 직후 ‘비 내리는 날의 양자강’이 모습을 보이고, 이후 한 남자가 양자강을 나와 옆 건물로 걸어가는 모습을 카메라가 멀리서 담고 있다. 이때 긴장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음악이 등장하는데, 일상의 모습과 비교해 돌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음악은 해당 작품이 건네는 일종의 단서일지도 모른다. 빗소리를 듣고 싶은 일상의 공간, 그러나 동시에 부도덕한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 그리고 우산을 들고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복을 입은, 가장 멀끔해 보이는 남자이다. 이 이질적인 요소들의 배치는 곧 비 내리는 날 양자강을 홀로 찾는 근수(강태영)과 이어진다.


비와 남자


양복을 입은 남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을 생각하면 그것은 근수이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자고 있다가 경적을 울리는 차에 익숙한 듯 승차하는 남자. 어떤 욕망이나 내적 갈등도 드러나지 않지만, 갑자기 단무지를 던지는 남자. 밥을 먹으러 온 것인지 2층으로 올라가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남자. 그런 그가 은미(강진아)에게 추근거리는 남자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도 덕순은 놀라지 않고 은미를 부축해 2층으로 올려보낸다. 다시 말해 근수의 행동은 갑작스럽지만 양자강과 덕순에게는 새롭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앞에 보이던 두 남자의 부도덕함 때문인 게 아닌, 은미라는 인물 때문인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

출처 - 퍼플레이

양자강은 겉보기와 달리 욕망이 가득한 공간이다. 그리고 근수는 그 안에서 욕망의 분출을 가장 적게 하는 인물로 보이고, 그것이 분출되는 순간은 그의 시선에 은미가 들어왔을 때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2층을 혼자 올라가 본 적이 없다.(덕순은 그에게 “혼잔 처음이구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다른 이들과 우연히 양자강에 온 그가 처음 은미를 보고 호감을 느낀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처음 홀로 2층으로 올라간 근수, 은미 역시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 듯 기다리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근수는 문틈으로 은미를 바라보다 이내 건물을 나와 우산마저 버리고 떠나버린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덕순은 추태를 부리는 남자의 머리를 뚝배기로 내려치며 화가 난 모습을 보이며 말한다. “쌍놈 새끼가, 사단을 내고 지랄이야 지랄을” 이때 지칭하는 남자는 머리를 맞은 남자가 아닌 근수일 것이다. 그는 분명 양자강에 어떤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문제는 바로 은미가 양자강을 나가 신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미가 왜 그토록 굳은 마음으로 신고를 한 것인지, 그리고 근수가 어떤 촉발재가 된 것인지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이 역시 그간 인물의 행동을 통해 추측이 가능해 보이며, 그 변화 자체가 바로 이 작품이 의도한 것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보인다.


그녀의 미소


은미는 이 작품에서 두 번 미소를 짓는다. 한 번은 퇴근하러 내려온 그녀에게 덕순이 남은 음식을 싸줄 때이다. 그녀는 양자강을 나와 걸으며 미소를 짓는다. 이때 그녀의 미소 일종의 소속감이 포함된 만족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웃음은 2층에서 근수를 기다리면서이다. 양자강에서 추근대는 두 남자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다시 말해 그녀 역시 다른 남자들과 달리 순수하게 자신을 좋아하는 근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근수는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게 또 어떤 이유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내적인 문제가 생겨 양자강을 떠나게 되고, 근수로부터 또 다른 행복을 느꼈던 그녀는 그의 부재로 인해 양자강을 떠나 신고까지 하게 된다.

출처 - 퍼플레이

양자강을 떠난 그녀의 모습은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누군가 소속감을 표현하며 준 남은 음식이 아닌 직접 사 먹는 음식, 이어서 주체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처벌까지 감수하는 태도는 인물의 큰 변화를 표현한다.(일종의 성장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근수가 있었다. 가장 무기력해 보이는 남자, 그런 그의 진심이 일상에 가려진 공간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인 것일까. 하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자리 잡은 인물은 근수도 은미도 아닌 바로 덕순이다.


변화, 다시 풍경


양자강의 변화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근수 때문이라는 사실인데, 언급했듯 근수는 양자강에 드나드는 남자들과는 달리 무기력해 보이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근수를 제외한, 비교적 변화를 만들 가능성이 커 보였던 이들은 오히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는 인물이다. 손님 없이 한적한 오후의 양자강, 이때 중년의 한 남자가 찾아와 술을 마시며 말한다. “내가 사실, 진짜 엄청난 사람이거든? 나만큼 고생 많이 한 놈도 없을 거야 아마.” 이에 덕순은 열심히 살라 말하지만, 그는 주변의 무시 때문에 열심히 살지 않겠다 말한다. 양자강은 밤낮 모두 욕망이 깃든 공간이다. 권력욕, 재물욕(첫 장면에서 도박을 하고 있다.), 성욕 등 많은 욕망이 깔려있다. 결국 우리가 가진 욕망은 겉으로는 힘을 가진 듯 보이지만, 일상의 풍경 속에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되려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욕망’이 아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변화 역시 이 작품은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

출처 - 퍼플레이

<비 내리는 날의 양자강>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것은 일상의 풍경 속에 담긴 덕순의 모습이다. 분명 두 장면 사이에는 변화가 있지만, 겉보기에는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 삶의 풍경이다. 부도덕함이 득실대는 공간. 그리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그간 느낀 적 없는 희망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지나가는 이들의 눈에는 그저 똑같은 풍경이다. 특히 비 오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양자강에는 또다시 비가 올 것이다. 앞선 ‘비 오는 날의 양자강’과 다를 바 없고, 누군가 또 다시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양복을 입고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다른 은미가 기다리고, 또 다른 근수가 찾아와 그녀에게 감정을 느껴도, 결국 양자강의 비 오는 풍경은 그대로이지 않을까.

출처 - 퍼플레이




이 작품이 담은 일상의 풍경은 스산할 정도로 냉정하다. 변화는 있지만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세상 앞에서 욕망을 갖거나 진심을 가진 행동은 분명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풍경의 이질감을 예민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알아차린다 해도 변화는 크지 않다. 그렇다면 그 무기력한 변화를 알아차린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풍경을 넘어서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차가운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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