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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Sep 13. 2021

단편 영화 <엄마가 결혼한대>

연기의 가치를 설득하는 연출, 연출의 가치를 설득하는 연기.

<엄마가 결혼한대>

2018, 전도희 감독



*해당 작품은 아래 링크에 가입한 뒤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cinehubkorea.com/







남겨진 이에 대한 영화이다. 다시 말해 슬픔이라는 감정과의 동행이 필연적이기에, 연출 역시 그 힘에 이끌려 감정에 편승해 중심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핸드헬드 샷’이나 ‘클로즈업’뿐 아니라 ‘반전’과 같이 직접적으로 감정적인 장면이 후반에 몰아치며 연출의 균형이 깨지는 경우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결혼한대>의 연출은 거리를 유지하려는 절제가 돋보이며, 언급한 반전 역시 생각지 못한 부분에 배치돼 방향성을 잃지 않는다. 또한 자칫 돌출되어 보일 수 있는 상징들 역시 플롯 안에서 맡은 바를 넘치지 않게 수행해낸다.



거리를 둔 눈물


동생인 태우(신현호)와 관련된 태희(전도희)의 갈등이 처음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녀가 아침에 담배를 피우며 창문으로 태우를 보는 순간이다. 태우는 그녀의 흡연을 보며 ‘안 된다’는 몸짓을 하고 태희를 그런 그의 모습에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표정으로 대신한 몇 차례의 반응이 오간 뒤 태희는 갑작스레 울기 시작한다. 이것은 앞선 병원에서의 눈물과 이어지는 그녀의 두 번째 눈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두 눈물의 장면들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감정적으로 앞서 나아가 감정과 서사의 속도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순간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그건 분명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 덕분이다.


출처 - 씨네허브

처음 병원에서 태희를 찍는 컷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곧바로 인물과 거리를 둔 컷으로 옮겨간다. 또한 베란다에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옆모습을 찍는 카메라는 다가가거나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상태로 그녀를 담아낸다. 즉 이 두 장면에서 카메라는 슬픔이란 단일한 감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며, 특히 베란다 안에는 시선을 사로잡거나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했기에 관객으로 하여금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오롯이 그녀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바로 그 거리 덕분에 작품이 관객보다 먼저 울어버리는 순간이 아닌, 동생과 관련된 갈등을 흥미롭게 질문하는 순간이 형성되며 긴장감을 쌓아간다.


반전의 역할


언급한 것처럼 태우가 태희의 상상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극의 후반이 아닌 중반에 배치된다. 일단 이 반전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면, 이에 대한 복선들이 돌출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전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 관련된 장면에 불규칙적인 힘이 들어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해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엄마가 결혼한대>는 그 반전을 감추면서도 힘을 싣기 위한 어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아침에 민식(안두호)이 그녀의 집에서 자고 있는 모습과 밖에서 홀로 놀고 있는 태우의 모습은 작게 충돌하며 의문을 만들어내고, 태우에게 말을 걸지 않는 엄마나, 밤에 나가려는 엄마에게 태희가 건네는 “가지 말라잖아, 엄마”와 같은 대사는 태우의 부재를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된다. 그러나 해당 장면들은 분명 어색하지 않은 연출로 이루어져 있고 돌출적이지 않아, 되려 관객이 조마조마해지는 순간은 최소화된다.


출처 - 씨네허브

그리고 그것은 반전이 중반에 배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긍정할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남겨진 자가 겪는 슬픔’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게 아니라, 개인의 병리적인 상태를 제삼자가 인지하는 순간으로 이어질 때 ‘어떤 변화를 겪을 수 있냐’는 것이다.


게다가 해당 반전은 극의 후반뿐 아니라 전반에도 영향을 미친다. 언급했던 베란다 장면을 상기해보면 손님인 민식은 그녀의 집 안에서 자고 있고, 태우는 홀로 밖에 있다. 즉 태우가 그 순간 집 안에 있거나 태희와 함께 베란다에 있지 못한 이유는 태우를 대신할 가능성을 가진 민식이 집안에 들어왔기 때문인데, 이는 태희의 손에 있는 담배를 보고 반응하는 태우의 몸짓과 함께 그녀가 가진 일종의 죄의식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그녀가 담배를 피우다 말고 우는 이유는, 동생의 부재에 대한 슬픔인 동시에 다른 인물로 동생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치료적 의지에서 발현된 죄의식인, 복합적인 감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입체적인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민식이라는 인물일 텐데, 반전이 드러난 이후 그의 행동을 좀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 보이며, 그로 인해 태희는 치유와 성장의 기회와 직면한다.


신발과 성장


태희의 엄마는 딸의 신발을 보고 낡은 걸 아직도 신고 있냐 말한다. 이 대사는 태희에게 태우와 관련된 낡고 아픈 기억은 잊으라는 말로도 들린다. 그리고 다음 날 태희는 엄마와의 식사 자리를 나와 홀로 집으로 향하고, 현관문에는 엄마가 사다 놓은 듯한 새 신발이 걸려있다. 이는 자식이 고통에서 해방되길 원하는 엄마의 마음이지만, 동시에 태희의 기억이 무작정 사라졌으면 하는 일방적인 바람일지도 모른다. 민식이 출연하는 공연장을 찾은 태희는 새 신발을 신고 있지만, 그녀의 시선 안에는 여전히 태우가 자리 잡고 있다.

출처 - 씨네허브

반면 공연이 끝난 뒤 동생이 보인다는 태희의 말에 민식은 눈에 보이는 걸 부정하거나 기억을 잊으라는 말 대신, 자신의 눈에도 그 동생이 직접 보이는 양 말하며 위로를 건넨다. 아닌 게 아니라 민식 역시 태희처럼 안 될 것 같은 일을 억지로 하려다 실수하는 인물인데, 연극 도중 그는 벗겨지지 않아야 할 자신의 신발을 실수로 벗기고 만다. 이때 벗겨진 신발은 객석 앞으로 날아가고, 이는 태희가 동생을 잊기 위해 포물선을 그리는 것과 상징적으로 이어진다. 결국 민식은 태희의 낡은 신발을 벗게 해줄 수 있고, 날아가는 뭔가를 응시할 수 있게 해주며, 잊음을 강요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출처 - 씨네허브

두 사람은 소극장을 나와 육교를 오른다. 그러다 새 신발을 신은 태희는 발을 다치고, 민식은 잠시 기다리라며 치료제를 가지러 간다. 치유를 해주는 누군가가 완벽할 수는 없고, 그 치유 역시 완전할 수는 없다. 동생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어 보이던 민식 역시 태희의 동생이 여자아이라 착각해 ‘언니’라는 단어를 쓰고, 연극에서 실수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기억을 점차 잊어보려는 태희의 발엔 아직 새 신발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동생을 직접 마주한 뒤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태희 자신이다.


남매는 다시 마주한다. 태희는 태우에게 엄마의 결혼식을 같이 가자고 하지만, 태우는 거절한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발현된 그의 대답은 결국 동생을 맘 편히 떠나보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눈물을 참기 위해 보였던 익살스러운 표정은 슬픔 없이 작별하려는 성장의 순간을 대변한다.

출처 - 씨네허브




<엄마가 결혼한대>에서 작품 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태희를 연기한 전도희 배우가 연출과 각본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민식이 태희에게 위로를 건네는 곳이 무대인 것은 상대에 대한 공감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이 불완전한 공감이어도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하는 사실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을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연기는 맡은 인물과 물리적으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공감을 매개로 하여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무언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일 테고, 연출을 맡은 전도희 배우는 공감의 영역 안에 있는 이야기를 영화 밖 연출자에서 멈추지 않고 직접 그 인물이 되어, 진정성 담은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엄마가 결혼한대>는 우리 일상에 필요한 공감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배우의 마음가짐을 질문하는 성숙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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