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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갱 Aug 19. 2023

감정이 그대로 나를 통과할 때

외면이 아닌 그대로 느끼며 지켜보기의 곤란함.

식은땀이 죽 흘렀다. 머리속이 다시 와글와글해지며 동시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약을 먹고 비상약까지 복용하고 전철을 탔음에도 또다시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이 쏟아져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사실 전철을 탈 생각을 하면서부터 손에는 식은땀이 계속 났다. 나는 손에 땀이 잘 나는 체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계선 인격장애의 치료의 일환으로 감정공부학교를 이수할 때 이럴 때는 한 발짝 물러서서 있는 그대로 감정을 관찰하도록 배웠다. 지금 드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 감정을 그대로 지켜보며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인데, 이 나름의 곤란함은 그렇다고 하여 감정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이 나를 그대로 통과하면서 그것들을 그대로 오롯이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그대로 모두 느끼면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마치 오래된 음식물 쓰레기의 모양새와 냄새를 하나하나 찬찬히 맡고 관찰하면서 치우는 것과 유사한 과정이다. 


결국 전철을 포기하고 버스를 몇차례나 환승을 하면서 하루 일정을 끝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이날 탄 버스만 해도 7개의 버스는 족히 넘는다. 체감온도 42도의 폭염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또 내리고, 길을 헤매면서 체력은 이미 다음 생의 것 까지 끌어 쓴 기분이었지만 적어도 시궁창같은 감정에서 허덕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후 이틀을 꼬박 잠만 잤으니, 어느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보통 강렬하고 격한 감정은 한 개만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수 개의 셀 수 없는 감정들이 맹렬하게 일어난다.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며 관찰하기에는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그 감정들은 엄청난 기세와 규모로 나를 압도한다. 오히려 외면이 쉬울 정도로 한발짝 떨어져서 구경하기에는 곤란하기만 하다. 외면은 다른 곳에 집중을 해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면 되지만, 관찰을 하기에는 수많은 감정들 하나하나가 그 기세를 줄이지 않고 나를 통과하기에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실 경계선 인격장애에서는 관찰하기가 맞을지는 몰라도 공황이 올때는 감정관찰하기는 오히려 좋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경험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습관이 무서운 것이, '두려워하지 말자' 라고 계속 생각을 하다보니 두려워해야 할 상황에서 조차도, 똥인지 된장인지 알면서도 자꾸 뜯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그 날의 나처럼. 빈 속에 계속 약을 뜯어먹어가며 어지럽고 속이 안좋아질때까지 미련스럽게 그렇게 있게된다. 이것도 조절이 수월하다면 내가 문제가 있을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나처럼 미련스러운 선택은 하지 않고 그냥 조심했으면 좋겠다. 내가 앞으로 그럴 것 처럼.


곤란한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은 괜찮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다. 감정이 나를 그대로 통과할 때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걸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곤란한 상황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호러무비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 처럼, 곤란함을 느끼는 정도는 누구나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그저 곤란함을 조금 더 쉽게 느끼고, 그 곤란함이 우리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공황이 찾아오는 것 보다는 두려워하고 미리 피하는 것이 비겁하고 나쁜일은 아니니까 우리가 느끼는 신호에 조금 더 다정해질 필요가 있다. 감정이 그대로 나를 통과할 때, 굳이 헤집어서 퀘퀘한 냄새가 나는 그 모든 것을 직시하지 않고 충분히 두려워하고 외면도 하고 곤란하면 도망도 쳐가면서 하루를 또 버텨내는 것이 조금 더 현명하고 안전하며,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모두가 곤란함에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응원합니다. 나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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