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리안 Oct 23. 2019

마녀를 위로해줘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기르고 있다






프롤로그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명의 귀에 들어간다는 격언이 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책임지지 않는, 어쩌면 책임질 생각이 애당초 없었을지도 모를 ‘입이 무척 가벼운’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천 명이나 듣게 된다. 맨 처음 말을 꺼낸 그 사람이 엄청나게 영향력 있는 인사여서가 아니다. 말을 옮긴 999명이 각설탕을 나르는 개미떼처럼 근면 성실해서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루머’라는 게 원래부터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만큼은 곧 죽어도 규율처럼 따르는 그릇된 믿음에서 기원한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 사실, 앞서 말했듯이 팩트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재미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어느 날 동네 미용실에 갔더니, 아침부터 ‘빠마(펌이라고 하면 도무지 맛이 안 사는)’를 하려고 모여든 아주머니들이 저마다 머리에 캡을 뒤집어쓴 채로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주제는........ 그냥 각자 하고 싶은 얘기만 하기? 더 정확히는 자기 말만 쉼 없이 하는 일방적인 방식.


그러니까 대화라고 보기엔 어렵고, 발표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산만해서 다 듣고 나면 ‘내가 방금 무슨 얘길 들었나’ 자문하게 되는 뭐, 아무튼. 그런데 왜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흡인력이 있어서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용실에 모인 이들이야말로 스토리텔링의 진정한 고수들이다.


난 염색을 하는 동안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초단위로 주제가 확확 바뀌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딴생각을 하지 않으려 나름 긴장하면서. 이 날의 화두는 단연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가십거리였다.


신문 기사에 실린 추측성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고, 일명 ‘찌라시’라는 명칭으로 떠도는 근거 없는 소문을 마치 자기가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들이 공유한 이야기에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했다는 거다.


소문에 저마다의 의견이 더해지니 순식간에 막강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여론은 여지없이 기정사실로 둔갑해버렸다. 고작 십오 분 만에 가십의 대상이었던 한 여자 연예인의 인생이 공중분해됐다. 남의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선입견과 편견’이 ‘아니 땐 굴뚝’에 기어이 연기를 피워내고야 만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선입견과 편견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마녀’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연상되는 마녀의 이미지는 매부리 주먹코에, 검버섯이 잔뜩 피어있는 얼굴, 눈 밑 지방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눈매가 더욱 험상궂어 보이며, 등까지 굽은 할머니다.


우리는 마녀의 생김새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다. 마녀의 데일리 패션이자 최애템은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원피스와 검은 망토, 커다랗고 끝이 뾰족한 모자다.


독거노인인 그녀는 숲 속 오두막집에 칩거하는 편이지만, 외출할 일이 생길 때면 하늘을 나는 빗자루를 타고 신속하게 이동한다. 괴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소확행’은 손수 구한 각종 마법 재료들을 솥단지에 다 때려 넣고 액체가 용암처럼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란 주걱으로 젓는 일로서, 그 액체는 주로 초록색을 띠고 있다.





마녀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고 하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명의 머릿속에 이런 모습들이 그려질 것이다. 그림책이나 만화, 영화와 같은 매체의 영향이다. <철학사전>이라는 책에 따르면 편견은 타당한 증거나 직접적인 경험과는 무관하게 특정의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감정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편견이든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원들은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어느새 편견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판단이나 평가의 척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단정해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내가 미용실에서 만났던 아주머니들이 한 여자 연예인의 인생을 멋대로 재단한 뒤 “걔는 원래 그런 애였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처럼 말이다.


뭐, 잘난 듯 떠들어댔지만 솔직히 나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에 대해서만 판단하고, 내가 겪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견해임을 인정하고,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길 언제나 희망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 많다.


다만,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살아갈 뿐이다.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두 마리의 개에게 습관적으로 먹이를 주면서도 안 그런 척하면서. 그러는 동안 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갔을까. 내가 준 먹이를 먹고 자란 두 마리의 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물어뜯어 상처를 입혔을까.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내도 거기엔 양면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너무 오랫동안 잊은 채로 살아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