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줄 아는 거라곤 무작정 성실하게 하는 것뿐
나이 서른에 접어들면서 지난 이십 대를 많이 회고하게 됐다. 남 못지않게 치열히도 살았고 몸 고생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무더운 날에 줄줄 흐르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찍어내며 부채질하기 바빠도 에어컨 한 번 켜지 못했고, 발가락 끝이 얼어붙을 것 같은 날에는 맨투맨, 수면 양말, 패딩 조끼가 잠옷이었던 적도 있었다. 보일러가 돌지 않는 방과 우풍이 심한 창문 덕에 컴퓨터를 하기 위해선 핫팩을 꺼내 장갑을 끼고 자판을 두들겨야 했다. 그렇게 생존과 투쟁하던 이십 대가 지나고, 상대적으로 삶은 안정권에 접어들었으나 다른 방황을 시작한 삼십 대의 내가 존재한다.
돌이켜보면 어린 날의 나는 최선을 다해 성실하고 바보 같을 만큼 착한 아이였다. 싫다는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해서 불평 하나 없이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는 그런 아이였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아이는 그렇게 둔하고 미숙한 어른이 됐다. 주어진 일을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하고 불만 같은 것도 가질 줄 모르고 스스로를 불태워 죽여가며 일하고 사랑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내 젊음을 팔 테니 제발 누군가가 사줬으면 하던 시절도 길었다. 그러다가도 나보다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을 보며 금방 죄책감에 빠지며 실체도 없는 대상에 힘껏 미안해했다.
이제는 배곯을 일도 없이 저녁 메뉴를 고르고, 무더운 여름엔 18도 강풍의 에어컨도 틀 수 있고, 휴대폰 요금이 밀려 전화가 끊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 됐다. 나에게 삼십 대는 그런 나이의 어른이다. 이십 대보단 안정적이고 이제야 정상 궤도에 올랐다는 안도감을 주는 나이, 무식하고 치열하게 보낸 이십 대의 결말이 이랬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또다시 방황이다. 정상 궤도라는 건 없는 게 아닐까. 배 부르고 등 따뜻해지니 이제는 마음의 평화를 찾아 나서고 싶어졌다. 으레 많은 청춘들이 겪듯 나 역시도 내가 진짜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는 차례다.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했지만 남들보다 못한 상황 덕에 남들보다 방황도 늦게 시작하게 됐다. 한국인들이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방황하는 삼십 대'가 돼보려 한다. 고생하며 얻은 모든 걸 다 놓게 되더라도 찾고 싶은 게 생겼다. 방황 한 번 없이 착실하게 여기까지 온 아둔한 어른은 이제 비포장도로를 가볼 생각이다.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걸 잃어 왔던 나는 딱 한 포인트, 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일 죽는 게 두려웠던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내 삶에 애정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에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제는 좀 끝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러다 극최근에 들어서야 당장 내일 죽는 게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일 죽는다면 오늘 하는 이 일이 내 마지막이 되어선 안 됐다. 그게 내 방황의 시작이었다. 나는 나의 내일 같은 건 관심도 없다. 당장 오늘의 내가 행복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평생 내가 할 줄 알았던 거라곤 무작정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기'. 그것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다. 나는 이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방황한다. 한국인이 만들어놓은 잣대고 평가는 다 필요 없고 관심도 없다. 내 몸은 조금씩 늙어 가고 뼈도 관절도 예전 같지 않고 살아 있을 날은 줄어가는데 대체 언제까지 남의 눈치만 보고 남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가야 할까. 소위 말하는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이 되어 버릴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에 대한 책임정도는 질 수 있는 깡다구 있는 멋진 어른이 됐다. 나에겐 내 실패를 감당해 줄 수 있는 돈 많고 능력 있는 부모님은 없지만, 실패를 감당하고 이겨낼 자신이 있는 내가 있다.
앞으로의 내 글들은 내가 그려갈 인생 방황기를 담을 예정이다. 그때그때마다의 감상을 회고하고 기록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