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보철 Feb 09. 2024

방랑의 여정-그곳에는 사막이 있었다

방랑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것  

  


두건을 두른 사내 둘이 수군거리는 말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가 이곳에 왔다. 서둘러 그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그는 언제 깨어난단 말인가?”


나는 의아했다. 천으로 된 막사였기 때문이다. 천으로 된 출입구를 열어젖히면 침상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내가 있는 천막에 들어올 수 있다.  


지금은 어둑새벽, 아직 어둠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이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이곳은 방향조차 가늠 안 되는 사막이다. 순간적으로 공포가 엄습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홀로 여정을 꾸리는 사람은 지금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동행이 있는 여정은 그럴 수가 없다. 상대방의 준비를 기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힘들어서 나는 여정을 함께 하자고 청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나의 여정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지난 늦가을, 우리는 여정을 꾸렸다. ‘우리’라는 말은 허윤민 대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항상 홀로 떠나는 방랑의 여정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당시 나는 타슈켄트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고, 그녀가 불쑥 우즈베키스탄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타슈켄트로 날라온 것은 한마디로 ‘일상의 지겨움에 대한 반란’ 때문이었다. 나 역시 ‘견딜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혀서 삶의 방향을 전혀 감지할 수가 없었던 터였다. 우리 둘은 의기투합했다. ‘삶으로부터 위대한 탈출 프로젝트’를 모의한 것이다.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 대부분은 고대 역사적 유물이 풍부한 사마르칸트, 부하라, 우르겐치, 히바 등지를 둘러 보기를 원한다. 특히 사마르칸트는 고구려 사신도의 벽화도 있을 정도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로 잘 알려져 있다. 간혹 아랄해가 있는 자치공화국인 카라칼파크스탄의 수도인 ‘누쿠스’를 방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이 초행길인 허 대표는 뜻밖의 여정을 선택했다. 사막으로 가는 길을 결정한 것이다. 나는 우즈베키스탄에 사막이 있다는 것을 몰랐었다. 사막투어 결정에는 타슈켄트에서 ‘코아투어(kortour)’를 운영하는 신현권 대표의 도움이 컸다.

  

“그곳에는 사막이 있지요. 사막에는 유르트라고 불리는 막사가 있습니다, 유르트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체험에는 절대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밤새 별이 사막으로 쏟아지는 광경은 잊을 수 없지요.”


허 대표는 밤하늘의 별을 보러 가는 것에 다소 흥분을 했다. 낭만이 가득한 목가적인 그림을 연신 그려냈다.

나 역시 유적지 등을 둘러보는 것은 마뜩잖았던 터였다. 사막이라는 말에 나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은둔자가 떠올랐다.


그 옛날에는 스스로 사막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복잡함을 피하려고 사막이라는 공간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자아와 갈등이 없는 공간을 찾아 사막으로 스며든 것이다. 그곳에는 순수한 침묵만이 있다. 순수한 침묵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모든 위대한 지혜는 빈 공간에서 흘러나온다. 후세 사람들은 침묵하는 그들을 ‘사막의 사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면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찾아 들어가는’ 나의 방랑도 그들을 닮아있다.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 사이에 사막이 펼쳐져 있다. 우리가 목표로 한 곳이 바로 그곳이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아프로시욥’이라는 고속열차로 이동하고, 사마르칸트에서 사막까지는 택시가 우리를 안내했다. 네비게이션도 설치돼 있지 않은 택시는 황야를 거침없이 달렸다. 거친 들판으로 길 아닌 길을 따라 달리는 택시가 정말 사막으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우리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도중에 택시기사가 가던 길을 되돌아간 적도 있었다.


차창 밖은 황무지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풍경 일색이었다. 차창 밖을 10분이라도 연속적으로 보게 되면 곧바로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지루해진 나는 음악을 선택했다. 폼플라무스(Pomplamoose)가 연주하는 검은 눈동자(LesYeux Noirs)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었다. 풀기없는 리더싱어의 음색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갑자기 그녀가 꿈 이야기를 꺼냈다. 꿈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로운 소재이다. 거짓투성이인 보이는 세상과 달리, 보이지 않는 세상에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그녀는 방에서 기절하곤 했다. 그때마다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방에서 쓰러져 있던 허 대표를 깨웠다.“어머니가 꿈에서 나타나 네게 가보래.”


돌아가신 어머니가 딸아이를 걱정해서 딸아이 친구의 꿈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십여 차례나 된다고 했다.


그녀가 꾸는 꿈은 현실과 직결되는 일들이 많았다. 예지몽을 꾼다는 것이다. 예지몽은 삶에 둔탁한 사람들, 세속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기운이 맑고, 영성이 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다.


꿈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들은 거짓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레스 인테르나)과 있는 그대로의 세상(레스 엑스테르나)을 구분, 자신이 인식하는 바가 실상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꿈이 실상인지, 삶이 실상인지는 나도 정말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지혜인 그 유명한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는 내 삶의 경험들이 진지하게 찾고 있는 의문이다.


꿈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사막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무려 5시간 가까이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마치 내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처럼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막의 밤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밖에 나와보니 온통 새까맣다.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린 것이다. 외부 어디에서나 조그만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칠흑 같은 어둠에 대해서는 극단의 두 가지 감정이 있다. 증오보다는 애정의 감정이 강할 것이다.


언제인가부터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 때문이다. 타인이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의 공간, ‘케렌시아’는 내게는 어둠 속이었다.

 

유르트는 텅텅 비어 있었다. 유르트는 천막 막사인 숙소이다. 한국의 방갈로로 이해하면 된다. 운영자의 말에 따르면 제철이 지나서 유르트를 찾는 손님이 드물단다. 손님들은 우리 같은 한국인은 거의 없고 이웃 나라인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종종 사막 체험을 하려고 온다고 했다. 사막은 유목민족의 향수를 자극하는가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사는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다. 밤새 뚫린 구멍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더구나 막사 안의 전기난로는 일부만 가동하고 있었다. 나는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추위를 막으려고 여러 장의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막사 밖으로 나왔다. 막사 밖에서 제일 먼저 나를 엄습하는 것은 적막이었다. 아무런 수식어도 붙일 수 없는, 또는 붙일 필요가 없는 적막 그 자체였다. 사위가 불빛 하나 없이 온통 새까맣다. 가냘픈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별들이 자욱이 펼쳐져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큰 별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저 별의 사연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은 것일까? 상상은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태초에 적막이 있었다.’


적막은 창조의 순간이다. 거대한 적막이 대폭발해서 우주 창조가 시작된 것이라고들 한다. 적막이 짙게 깔린 이곳, 사막은 이야기의 보고이다. 지구탄생 이래 신화와 전설, 민속, 판타지, 영웅, 우화, 서사시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사막 저편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먼동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당연히 늦잠을 잤다.


“밤새 꿈에 시달렸어요. 한 번도 꿔보지 못했던 꿈들을 연이어 꾸었지요.”


허 대표에게 꿈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구체적인 꿈 얘기는 하지 않았다. 숨기려는 것보다는 내가 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꿈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꿈인지를 기억하는 ’꿈의 기록자‘이다. 또한, 꿈속에서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이를 자각몽이라 부른다.

 

우리는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사막을 달리던 택시기사가 잠시 차를 멈추었다. 고양이 같은 동물 한 마리가 태양을 향해 서 있었다. ‘사막의 파수꾼‘ ’태양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미어캣‘이었다. 미어캣의 자세는 ’생각하는 로댕‘이 서 있는 모습 같았다. 황량한 사막에도 사색을 즐기는 동물이 살고 있다는 생각은 나만의 판단일까?


다시 택시는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환호성을 터뜨렸다. 사막에서 호수를 만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호수의 크기는 엄청났다. 멀리 시선이 머무는 곳에 호수와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사로잡은 것은 호수의 크기보다는 인적이 끊긴 호수라는 점이었다. 태곳적부터 원시 그대로 보존된 호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수의 이름은 ‘투다호’ 다.

 

호숫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호수를 시시각각으로 변형시켰다. 햇살이 내리쬐는 각도에 따라 오렌지빛, 보랏빛, 붉은빛 등 빛의 향연이 호수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순간 태양 속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 남자는 누구일까? 나도 모르게 서서히 태양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 모습도 보였다.

사막에서처럼 이곳 호수에는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호수 곳곳에 특히 다양한 신화와 전설의 상징적인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말을 빼앗아버렸다. 말이 사라진 곳에서는 시간은 작동하지 않는다. 시간 너머 차원의 공간으로 우리가 들어온 것이다.

  

타슈켄트로 돌아온 후, 허 대표는 곧바로 한국으로 귀국했고, 나는 한동안 우즈베키스탄에 머물다가 연말쯤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우리는 사막과 호수에서 받은 느낌을 두고두고 여러 차례 피력했다.

인제야 고백하건대 사막투어 이후 나의 삶은 사막의 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꿈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이 구별되지 않은 것이다.


귀국 후 나는 꿈에 시달렸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잠깐 선잠이라도 들면 어김없이 내가 찾아가는 곳은 사막이었다.


꿈에 시달린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활력이 사라지고, 게을러졌다. 게을러졌다는 것은 육체적인 게으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존재는 산산이 찢겨 정신적, 감정적으로도 무력해졌다. 열정은 사라지고 주어진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그것은 몰락이었다. 나의 몰락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 세상에는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우연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몰락 역시 우연이 아니다. 몰락의 원인을 시간 속의 인과 법칙으로 찾을 수는 없다. 시간 순서대로 원인과 결과가 이어진다는 세속적인 판단은 거짓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의 모든 원인은 영적인 문제였다. 나의 몰락 역시, 영혼에서 비롯됐다. 갑자기 피폐해진 영혼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 너머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는 세계에 머무는 자는 거짓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영혼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상상이다. 꿈꾸는 자는 상상하는 자이다. 위대한 상상은 꿈에서 비롯된다. 상상은 환상이 되고, 환상은 현실이 된다. 이들에게 꿈은 삶이고, 삶이 꿈이다. 꿈꾸는 자의 상상 속에서 영혼은 명료하게 깨어난다. 즉 내게 절실한 것은 꿈의 회복이다. 꿈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막투어를 갔다 온 지 석 달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나는 사막 꿈을 연속적으로 꾸고 있다.

꿈속에서 나는 사막의 막사 안의 침대에 누워 있다. 어둠 속의 막사 밖으로는 두건을 두른 사내들이 수군거린다.


“먼동이 곧 터오는데 …, ”


나는 두건을 두른 사내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곤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검은 눈동자의 사내가 점점 익숙해진다. 그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수백 수천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검은 눈동자의 사내와 언제쯤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언제쯤 보이지 않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의 현실이 상상이 되는 시점은 언제쯤일까?

작가의 이전글 방랑의 여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