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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라라 Mar 12. 2024

INFP에게 최악의 직장을 그만두었다.

내향형 인간 미취학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니, 알바인가. 하루 네 시간 짧은 근무이니 알바가 맞다. 알바라면 해볼만큼 해본 나이다. 이것도 나를 지나간 수많은 알바처럼 그렇게 무던히 해내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했던 알바 중, 그리고 풀타임 근무를 포함하여 가장 힘든 일이었다.


내가 그만둔 일은 미취학 아동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5세부터 있었다. 연필을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a,b,c 알파벳을 가르쳐야 했다. 이곳은 어학원을 표방한 학습식 영어학원이었다. 물론 원장이 학부모와 충분한 상담을 하고 아이를 받았다. 영어식 표현과 한국어 표현을 같이 하고, 알파벳을 익히고, 음가를 익혀 리딩까지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아이들은 하나씩 보면 귀엽다. 하지만 멀리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랬다. 아이들이 처음엔 선생님을 탐색한다. 나의 장난을 어디까지 받아줄까 극한까지 테스트를 한다. 그리고 선생님이 빵 터지는 순간 입력한다. "여기가 마지막 선이군." 하지만 선생님은 빵 터져서는 안 된다. 극한까지 침착함을 유지해야 하고, 안정된 목소리로 아이를 상대해야 한다. 아이와의 보이지 않는 끝없는 줄다리기다. 


두 아들을 키우며 할 만하다 생각했다. 왜 아들 엄마를 불쌍하게 보는지 그 시선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찐 에너지 넘치는 남자아이"를 보니 그 시선들이 이해가 갔다. 나는 그저 운이 좋은 아들 엄마일 뿐이었다.


나의 에너지는 아이들을 받아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오전은 집안일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놓고, 오후에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보육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다시 집에 와서 저녁을 차리고 치우고 우리 아이들 공부를 봐주었다. 방학 때는 여기에 점심차림이 추가된다. 인생의 모토가 '여유 있는 인생'인 나에게 이건 극한의 스케줄이었다. 처음에는 할만할 줄 알았다. 체력은 마음가짐에 달려있으며 마음을 여유롭게 먹으면 어떤 스케줄도 하나씩 클리어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금껏 바쁜 시기는 그렇게 넘겨왔으니까.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미취학 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였다.


나는 말하기를 귀찮아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의도치 않게 잔소리 거의 없는 엄마다. 아이들도 아빠에게 잔소리쟁이라 말한다. 상대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4시간을 풀타임으로 떠들어야 한다. 쉬는 시간이 없지는 않다. 분명 10분의 쉬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 힘들다. 수업시간은 그래도 선생님과 아이들이 말하는 타이밍이 다르다. 나는 설명하거나 묻고, 그들은 대답한다. 물론 수많은 인터셉트가 들어오지만 어쨌든 너와 나의 말하기 타임이 나눠져 있다. 


쉬는 시간은 아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 내가 한 아이의 말을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면 다른 아이 둘이 동시에 자기의 말을 시작한다. 아이의 말은 앞뒤가 안 맞고 비논리적이다. 당연하다. 아이와 백 분 토론을 하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이백살이에요."(누구 할머니 생신잔치에 갔는데 연세가 많으셨다는 얘기 후 옆의 아이가 한 말) "저번에 우리 오빠가 다쳐서 욕조에 가득 찰 만큼 피가 났어요."(누가 주말에 다쳐서 무릎에 반창고를 붙이고 와 내가 많이 아팠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자 옆의 아이가 한 말) 등등의 말을 일일이 호응해 주는 것은 정말 기 빨리는 일이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부딪힌다. 물리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선생님에게 와서 상황보고를 한다. 누구의 말도 믿어서는 안 된다. 모두 조금씩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말하므로. 나는 누구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위로해 주고 공감해 주며 차후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나는 집에서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한 시간을 멍 때릴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다. 텅 빈 시간을 좋아하는데 학원에서의 네 시간은 고밀도 고농도의 시간이다. 소리가 내 귀를 방해하는 것이 싫어 음악도 잘 안 듣는다. 하지만 학원에서는 수많은 소리가 켜켜이 쌓인다. 10중주 불협화음이 끊임없이 울린다. 


말하기도 귀찮아하는데 목소리는 더더욱 작다. 식당에서 손을 들고 "여기요!"를 외치지만 종업원의 목소리가 종업원의 귀에 닿지 않아 제발 나를 쳐다봐 주세요, 하고 간절히 아이컨텍을 시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수업 때는 크고 작은 목소리의 변화구가 다양해야 하고 때로는 목소리 크기로 아이들을 이겨야 한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목감기를 달고 살았다. 목캔디와 따뜻한 차를 항상 내 옆에 두었다. 


원래 내가 하던 일은 무역업이었다. 하루에 백 통 넘게 이메일을 쓰는 날도 많았다. 힘들지 않았다. 하나씩 하나씩 쳐나가면 되었으니까. 저녁이면 보낸 편지함에 백 통의 이메일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상대로 한다는 건 이메일 백통을 말로 전하는데 이게 순서도 없고 맥락도 없고 한 번에 다섯 개도 한꺼번에 쓰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그랬다. 


일을 그만둔 나는 비로소 앉아 글을 쓸 여유를 되찾았다. 목소리도 점차 돌아오고 있다. 음악은 여전히 켜지 않는다. 한동안은 조용히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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