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임산부 배지 받아왔어.라고 말하자
와 그거 다 쓰면 나 좀 줘라. 나도 쾌적한 출퇴근길 다녀보자!라는 말을 들었다.
임산부의 출퇴근길은 전혀 쾌적하지 않다. 특히 초기일 경우 외관상 전혀 티가 나지 않고 가방에 작게 달아둔 분홍색 배지가 임산부라는 표시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걸 달았다고 해서 출퇴근 시간의 혼잡한 지하철 플랫폼이나 버스정류장에서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쫙 열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걸 바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아무도 대중교통수단 안에서 남의 가방끈 쪽에 뭐가 달렸는지 관심을 두지 않고, 둘 수도 없다. 따라서 배지가 달린 것을 보고 자리를 양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앞에 서있는 사람이 임산부임을 확인하더라도 선한 마음으로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니 임산부는 내가 이 사람 앞에 서 있어서 괜히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건 아닌지 불편한 마음으로 서있을 수밖에 없다.
그저 희망하는 것은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의 온정과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앉아서 갈 수 있다. 간혹 배려석은 배려일 뿐이니 평상시에 비워두지 않고 누구든지 앉아 있다가 배려 대상이 탑승하면 비워주면 된다는 의견이 제시될 때가 있다. 그러나 배려 대상의 외관상, 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탑승자들을 식별하는 데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위의 의견은 실제 배려로 이어지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식사 도중 가벼운 근황 이야기 중
아 밤중에 자고 있는데 갑자기 부인이 두리안 같은 거 먹고 싶다고 하면 진짜 짜증 날 것 같아요ㅎㅎㅎ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결혼하고 아직 아내분의 임신을 겪어 보지 않으신 남성분이셨다. 웃으면서, 상대방도 웃으라고 하신 말씀인데 나는 전혀 웃기지가 않았다. 나는 다행히 입덧이 심하지 않고, 특정 음식만이 갑자기 먹고 싶어 졌던 경험은 없다. 그러나 입덧이 있을 경우 다양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몇 가지 제한된 가짓수의 음식만 먹을 수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리고 음식을 먹지 못한 공복 상태에서는 입덧 증상이 더 심해지고, 입덧 때문에 잘 먹지 못해서 혹여나 아기가 잘 자라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 먹고 싶은,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음식이 떠오르면 얼마나 기쁠까! 갑자기 밖에 나가서 사 와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먼저 나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요즘은 배달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굳이 나가서 사 오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음식을 공수할 수 있다!
아이 성별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아들이라고 답하자
'그래요... 별로 마음에 들진 않겠지만~~'으로 시작되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깔깔 웃으면서 답했다. 실제로 아들이라고 했을 때 정말 진심 어린 축하와 부러움은 받은 적 없기 때문이다!! 모두들 어색한 웃음을 짓거나 아들'도' 좋다는 애매한 멘트만 쳤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 양가 어머니들도 딸이 아니라서 아쉬워하셨다. 상대적으로 적은 활동량으로 키우기가 수월하다는 인식과, 나중에 엄마와 친구 같은 사이로 지내면서 엄마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 더 야무지고 똑 부러진다는 이미지 때문에 요즘은 딸아이가 선호되는 것 같다.
위의 대화 상대는 내가 모시던 남자 이사님이셨는데, 그분께서 든 예시도 요즘 면접을 보면 여성 지원자들이 훨씬 더 말도 잘하고 똑 부러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똑 부러진 알파걸들 사이에서 뭔가 어리바리하고 부족해 보이는 남성들은 설 자리가 없다는 푸념이었다. 나도 하하호호 웃으면서 맞장구치다가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이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아니 상대방이 무슨 권한으로 남의 자녀의 성별에 대해 아쉽다느니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느니 판단을 하는 것일까. 그 부부가 해당 성별을 오매불망 기다렸을 수도 있었을 수도 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멋대로 상대방의 감정을 판단하는 게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혼자 씩씩거리면서 기분 나빠하다가, 모든 일이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나도 그 말을 처음 들은 순간에는 요즘 사회 분위기에 맞장구치며 깔깔 웃어댔으니 말이다. 그때는 이사님 앞이라 가식을 떨었던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웃겨했었다ㅎㅎㅎㅎㅎ그리고 사실 당시에 바로 기분이 나빴더라도 정색을 하면서 '남의 감정을 맘대로 판단하시다니 무례하시군요 이사님.' 이렇게 대꾸할 수도 없었을 일이니.... 혼자서 웃긴 해프닝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글로 쓰게 되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남자애들보다 '똑 부러지고' '자기 밥그릇 잘 찾는' '뭔가 얄미운' '언어 능력이 남자보다 뛰어나 면접도 유리해서' '남자애들 설 곳을 잃게 만드는' 그 많은 알파걸들은 도대체 다 어디에 있는 걸까. 왜 많은 회사 고위직들은 아직 대부분 남성들인 거지.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여성 당선인들이 얼마나 나올까?
모든 고정관념, 편견들은 경험의 일천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임신 전에는 몰랐던 임산부들의 이런저런 고충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위의 세 에피소드들도 경험해보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임산부가 탄다고 모두들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는 걸 경험해봤다면, 사랑하는 와이프가 아무것도 못 먹고 게워내기만 하는 것을 직접 봤다면, 아들 딸 고루 키워봤다면 저런 언사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어떤 주제에서는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섣불리 단정 짓고 판단하여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