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ting Lounge (02)
말만 하면 척척 대답한다. 궁금한 건 굳이 노트북을 열지 않아도 된다. 대답만 하는 줄 알았더니, 시나리오, 그림 등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영역까지 해낸다. 이러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영화가 현실이 될까 두렵기까지 하다.
최근 ‘열풍’을 넘어 ‘광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ChatGPT의 이야기다. 그 개념 자체가 예전에 없진 않았다. 이미 AI(인공지능)을 통해 직원을 대체하는 AI챗봇과 산업자동화 수준은 금융, 물류, IT 등 대다수 산업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ChatGPT가 놀라운 건 그 수준이 획기적으로 올라갔다는 점이다. 최근 선보인 4.0 버전은 텍스트에 이어 이미지까지 분석하고 그 대답까지 해낸다. 인간의 시각, 그에 연결된 뇌의 작업영역까지 침투하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ChatGPT는 수억 단위의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조합해 인간의 요청에 대한 대답을 해낸다. 인간 중 단기간에 그처럼 많은 데이터를 학습해낼 사람은 없다. 4.0 버전은 지원언어도 26개로 증가하고, 한번에 2만 5,000개의 단어를 기억하고 이해한다고 한다. 사상 유례 없는 기술의 격변이다.
바야흐로 산업혁명, 바이오혁명에 이어 이제 인간 스스로에게까지 위협이 될 수 있는 ‘디지털 지능 혁명’(이하 디지털 혁명)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기술의 도약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고 아무런 찬반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나마 디지털 분야는 유전자조작과 돌연변이로 많은 윤리적 문제를 불러일으킨 바이오혁명에 비하면 데이터와 컴퓨팅에 관한 것이니 한발 떨어져 보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 싶은 건 ‘디지털 빈부격차’의 문제다. 역대로 인류는 큰 기술진보가 있을 때마다 그 뒤에서 엄청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 즉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그에 따른 제국주의란 망령에 시달려야 했다. 획기적인 도구가 그걸 다룰만한 양심과 지혜가 개발되기도 전에 그걸 소유할 자격이 없는 이의 손에 먼저 쥐어졌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그 대표격이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토대를 만든 대형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전 세계는 농업이나 유목 등 1차 산업 위주로 돌아갔다. 그런 사회에선 이동량도 적기 마련. 구태여 내 논밭이 여기 있는데 옆 동네까지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것도 딱 내가 생산해내는 것 정도 수준. 소비와 공급이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사회였던 셈이다.
산업혁명은 다르다. 혼자서는 하루에 못 50개를 만들던 노동자가 갑자기 분업을 통해 일일 평균 200개 이상으로 생산량이 늘어났다. 갑자기 생산량이 늘어나면 그 시간만큼 근로자가 쉬면되겠지만,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 늘어난 제품을 팔고 또 못을 만들 만한 원료를 공급해줄 시장이 더 절실했다. 유럽 열강들이 하나같이 배에 무기 싣고 남미와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로 ‘식민지’ 개척을 떠난 이유다.
그 결과는 다들 잘 알다시피 거대한 ‘제국’의 탄생이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구주 열강에 이어 아시아에선 저 또한 서양에 강제 문호개방 당했던 일본이 제 스스로 ‘제국’이 되겠다고 만용을 부렸다. ‘대동아공영권’이란 해괴한 논리와 그 뒤를 이은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확전이었다.
전 세계가 폭주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고도화된 자본주의, 그것이 이론으로 정립된 제국주의는 적을 넘어뜨리고 내 시장을 늘릴 전쟁기술 개발에 미친 듯이 골몰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아인슈타인의 원자폭탄과 수많은 살상기술. 그 기세등등했던 일본제국주의를 단 2발로 함락시킨 무서운 무기였다.
전쟁이야 그렇게 끝났어도 아직 제국주의의 상흔까지 끝난 건 아니었다. 아프리카 각국을 비롯해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해 개발에 박차를 가한 건 20세기 중후반. 아직도 그 상당수의 국가는 빈곤을 못 벗어날 정도로 제국주의의 상처에 시달리고 있다. 인류는 정작 ‘산업혁명’이란 뛰어난 도구는 개발했지만, 그를 제대로 다룰만한 논의나 이데올로기는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 차별하기론 바이오 혁명 또한 뒤지지 않는다. 종자개량, 치료약 개발 등 수많은 진보가 있어왔지만, 그 수혜자는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고스란히 선진국의 몫이었다.
흔히 세계 경제구도가 아시아는 생산, 아프리카는 원료를 담당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의 몫은? 그 생산 작업에 돈을 대는 금융이나 제약, IT, 기술 등 고부가 사업을 선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산업혁명 이래 구주대륙이 오랫동안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과거 식민지 전후 벌어들인 돈, 기술발전에 써서 아직까지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약과 의술이 발전했다 한들, 그 약을 써볼 능력이 안 된다면 그림의 떡과 같다. 당장 한국에선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결핵도 아프리카와 후진국에선 상황이 다르다. 흔히 ‘나병’으로 알려진 한센병 또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항체를 갖고 있으며, 설령 걸려도 치료약이 잘 개발돼 비용이 비싸지 않다.
후진국은 다르다. 그 약을 공급해줄 유통망과 시설도 부실한데다 정작 있다 해도 소득수준을 감안하면 쉽게 처방받을 수가 없다. 즉, 말만 좋아 새로운 의술의 시대인 것이지 정작 그 ‘접근’에선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격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코로나 사태였다. 2020년 발병 이후 초기 백신을 개발한 것도 선진국 위주 글로벌 제약회사, 그걸 턱턱 거액의 돈을 내며 정부 차원에서 선점한 것 또한 선진국들이었다. 그에 비해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 빈국들은 접근 자체도 제한적이었던 데다 살만한 재원 마련도 쉽지 않아 집계도 되지 않은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곤 했다.
기타 곡물종자나 개량 품종에 대한 접근 또한 차별적이다. 코로나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각국에서 우수품종을 개발한다 해도 후진국은 이를 도입할 만한 인프라와 여건이 넉넉하지 않다.
그들이 선진국에 비해 니즈가 낮은 것일까? 아니다. 식량과 안전, 의료 등 인간의 기본 욕구에 대한 니즈는 후진국이 선진국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니즈를 해결할 만한 ‘경제력’이다. 세일즈의 대가인 데일 카네기가 정의한 고객의 요건은 2가지, ‘니즈’와 ‘경제력’이다. 선진국은 그 둘 다 넉넉하다. 내가 뭐가 필요한 지도 알고, 그걸 해결할만한 경제력 또한 있다. 후진국은? 뭐가 필요한지는 알지만, 그걸 해결할만한 물건이 있다는 것도 모르거나 살만한 ‘경제력’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즉, 그들은 거대 제약사나 품종개발회사의 ‘고객’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재화는 니즈가 아니라 경제력에 따라 얻을 수 있다. 후진국은 산업혁명과 바이오혁명 그 어디에서도 ‘수혜자’가 되진 못한다. 당시 기준 낮은 수준의 재화에 대한 소비자나 원료시장, 즉 여전히 ‘식민지’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전 지구적인 생활수준이 올라가면 가난한 나라 또한 혜택을 보지 않겠냐고. 맞다. 다만, 경제는 상대적인 것이다. 옆집은 슈퍼카에 뷔페 먹고 다니는데, 나는 자전거에 맨 쌀밥 먹으면 나도 나름 행복할까. 그보다는 왜 ‘같은 인간’인데 내가 선택하지 않은 ‘출생’ 때문에 내가 가난해야 하냐고 더 불만을 품게 되지 않을까.
ChatGPT는 많은 산업의 모습을 바꿀 것으로 보인다. 가장 손쉽게는 고객상담 직군이 전면 AI로 교체될 수 있다. 쇼핑몰 전화상담원 뿐 아니라, 이미 은행권에서는 ARS와 연계된 AI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나아가 금융계 전반, 고객 서비스 일체, 업종별로는 유통, 금융, 음식료, 항공, 수송 등 고객의 ‘요청’ 처리가 필요한 전 영역에서 인간이 일자리를 내놓을 수 있다.
창작분야도 마찬가지. AI에 의한 웹툰, 소설 창작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슈퍼컴만 있으면, 아니 그 솔루션을 빌려쓸만한 재원만 마련해 기존 작품들 데이터만 때려 넣으면 365일 24시간 지치지도 않는 AI 창작자를 얻을 수 있다. 이제 작가들은 슈퍼컴인 ‘알파고’를 상대했던 이세돌 9단처럼 새로운 기계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물류 분야에선 100% 자동화도 가능하다. 고객의 주문과 해당 제품을 로봇이나 드론으로 배송하는 건 물론, 대형선박을 통한 자동 배송도 가능하다. 고객의 요청(=Query, 쿼리)를 읽고 해석해, 마찬가지로 자동화된 선박 입출고 시스템에 ‘알아서’ 지시하고 자동 내비게이션 장치로 배는 스스로 출항한다. 악천후와 각종 운항시 변수 또한 상황별 대처요령을 쿼리로 입력해놓으면 OK. AI는 입력된 변수값에 따라 스스로 24시간 항해를 계속할 것이다.
창작분야도 마찬가지. AI에 의한 웹툰, 소설 창작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제 작가들은 ‘알파고’를 상대했던 이세돌 9단처럼 새로운 기계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자, 요약하면 인간은 상당수의 노동에서 해방될 전망이다. 그렇다고 그가 쉴 수 있을까. 앞서 말한 산업혁명을 되짚어보자. 당시 인간은 자급자족 경제에서 도시 위주 대량공급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사회가 이전됐다. 인간의 생산량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고 소비할 수 있는 물건 또한 엄청나게 늘었다. 단, 인간의 휴식시간은? 우리는 더 쉴 수 있는 자유 시간을 얻었나?
모두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전기와 모터를 개발해 밤이 낮처럼 된 이후에는 낮처럼 밤에도 교대든, 격일제든 계속 공장은 돌아간다. 출퇴근 개념과 함께, 집-회사라는 공간 외에 나 혼자 머물만한 ‘제3의 공간’ 서비스도 활성화됐다. 요컨대 발전은 했지만, 점차 더 번잡스러워진 것이다.
여기서 배를 불린 건 그 엄청난 생산량을 독점한 자본가들이었다. 그들은 사업을 영위했고 거기서 번 돈으로 또 다른 공장을 세우면서, 동종인류인 다른 인간의 노동을 갈아 넣었다. 그 다음 자국민 노동자로도 모자라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세계대전이란 참극까지 벌였다. 자본주의가 불러들인 ‘제국주의’란 거대한 탐욕이 만든 비극이다.
물론, 현대 수정자본주의에선 자본가 혼자 이렇게 질주하기란 어렵다. 다만 ChatGPT가 인간의 생산성을 엄청나게 증가시켜줄 것은 확실하다. 대체 누가 그 몫을 가져갈 것인가. 우리는 그 답 또한 잘 알고 있다. 산업혁명 당시처럼 ‘글로벌 기업’이라 부르는 자본가들이 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걸.
ChatGPT는 엄청난 양을 학습해 결과값을 내기 때문에 그 학습할 만한 서버와 시스템 구현에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국내에도 단 몇 개 기업이나 단체만이 ChatGPT를 응용, 발전시킬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이유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네오 디지털’ 자본주의는 분명 나타날 것이다. 또한 그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혁명과 코로나 때 입증된 것처럼, 코로나 때 그런 것처럼, 선진국-자본가 위주의 이익 독점은 가속화될 것이다. 후진국은 선진국이 개발한 솔루션이나 서비스를 비싼 값에 소비하거나, 디지털이 아무리 발전해도 처리 못하는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 원료와 농작물 재배 – 이 또한 AI가 대신할 수 있다! - 등과 같은 저부가 산업에만 종사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구도가 디지털 시대의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를 극대화시킬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름하여, ‘新 디지털 제국주의’의 탄생인 셈이다. 과연 그게 맞는 방향일까. 인류는 계속 니즈보다 경제력을 중시하며 타인을 갈아넣어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데에만 골몰해야 하는가. 그게 궁극적인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동네 햄버거 가게에 가보면 쉽게 볼 수 있는 주문 키오스크. 그 앞에는 사용법을 몰라 망설이는 노인들이 많다. 종업원이 아닌 기계에게 주문하는 일은 그들에게 참 낯선 일이다. 그럼에도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기술을 소화해내지 못하면,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리는 어린세대들에게 곧 밀려나게 될 것이다.
이런 세상은 지양했으면 좋겠다. 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기술을 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그 기술을 자신의 부와 독점을 향해 사용하는 인간의 ‘탐욕’이 세상 모든 격차와 불공평, 디지털 제국주의까지 만든다. 이는 산업혁명이 생산량은 증가시켰지만 인류의 행복과는 별개의 관계인 것처럼, 그 방향부터 재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술은 인간을 향할 때 그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인류 전체보다는 내 탐욕을 위해 개발 위주로만 달려왔다면, ChatGPT가 증가시킬 세상은 보다 본연적인 인류 전체를 위한 공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제력이 아닌 니즈가 배분의 중요 고려요소가 되고, 기술 빈자를 위한 각종 배려와 지원이 함께 마련될 때에야 비로소 모두가 신기술을 환영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이다.
나는 산업혁명이 없애버린 모두의 밤하늘을 되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