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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알베르게 안의 고독, 리오피코

18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기 13 - 순례 10일차

밤늦게까지 떠들던 순례자들이 모두 잠들고 난 뒤 알베르게는 가끔 콜록거리는 남녀 순례자들의 기침 소리를 빼고는 온통 조용했다. 함께 저녁을 먹었던 영국 떠거머리 총각이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을 나눠 주었다. 술과 함께 먹지 말 것, 잠자기 전에 먹을 것 등 약 표면에 있는 주의사항을 알려주니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창 밖으로는 늦가을인데도 파란 달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통은 남녀 방이 따로 배정되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같은 방에 모두들 배정됐다. 사람이 워낙 많기도 하고, 서로 정해진 길을 가는 순례자들끼리 방을 나눌 필요도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욕실과 화장실은 분리되어 있는데, 여자는 바로 침실 앞에 있었지만 남자는 한층 더 올라가야 하는 것 빼고는 편안했다.
아침에는 어제 같이 저녁을 먹은 영국-호주 팀과 소란스러운 식사를 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준비한 팀/사람대로 바로 순례길을 떠난다. 아마 늦어도 9시면 이 알베르게가 모두 텅 빌 것이다. 알베르게 규칙이기도 하고 순례자들도 여행 온 게 아닌데 늦게까지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 셋씩 무리지어 가는 길을 나는 혼자 걸어갔다. 같이 온 이도 없었지만, 가려면 다른 무리들과 섞여서 가면 되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의 쌀쌀한 기운이 뺨에 스쳐 왔다.



순례자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산길

순례 10일차 산길에서 만난 돌로 만든 'Buen Camino' 인사. 돌들이 다 들어갈만한 저 넓은 공터에서 나는 '홀로' 쉬었다.



벨로라도를 나와 처음에는 조금 평탄한가 싶더니 이내 산길에 접어들었다. 한국어로 표지판도 있는 – 순례 당시에는 하도 경황이 없어 발견하지 못했다 – 산 후안 데 우테르가(San Juan De Uterga)까지는 그 앞뒤로 높고 낮은 산길이 꽤 있었고, 중간중간 말과 소도 많이 만났다.

날은 제법 쌀쌀했다. 어제 만난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사이에 어느새 다시 혼자가 되었고, 때때로 어제 저녁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도 하고 그러면서 걸었다. 그러다, 깊은 산속 공터가 나오는데 그때부터 나는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한참을 앉아 기다려도 다른 순례자는 지나가지 않고 숲 속 공터는 꽤 크고 여기저기 순례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나 혼자 남아서 배낭을 옆에 두고 한참을 쉬고 있었다.
사실 평야를 걷든, 도시를 걷든 큰 차이는 없다. 항상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것, 만약 귀에 헤드셋이라도 하고 있으면 서울에 있든 뉴욕에 있든 여기 산티아고에 있든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눈만 질끈 감아버리면, 아니 구태여 감지 않아도 누군가 내게 말하지 않으면 나는 그대로 혼자다. 산티아고에선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산과 들, 평야가 나와서 그걸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돌산을 힘겹게 올라서고, 한두 시간 걸어가면 만나는 다음 마을에서 잠시 다리를 쉬어 갈 때도, 햇빛 속에서도 비 내리는 날에도 간혹 가다 들리는 ‘부엔 카미노’ 소리를 제외하고는 나는 혼자다.
이런 마음이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또 혼자라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서 인사를 해주는 그들이 매우 반가울 때도 있다. 사람들 옆에 있을 때는 번거롭고 시끄럽더니 막상 나 혼자가 되니 그 안에 있었던 내가 다시 그리운 것이다. 어차피 그곳에 있으나 이곳에 있으나 큰 차이는 없을 텐데 말이다.
한참을 걸어가다 저녁 무렵, 산꼭대기에서 거대한 십자가를 마주쳤다. 그 밑에 모여 있는 돌무더기. 누군가는 힘든 길을 이렇게 올라가 십자가를 만들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그 길을 가면서 땀과 눈물과 기억을 흘리고 간다. 우리가 걸어가는 것은 결국 길이 아니라 내 안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는 고독의 길에 다름 아니다.


조그마한 레스토랑 2층의 텅 빈 알베르게

한글로 '안녕' 인사도 있는 산 후안 데 우테르가 수도원. 내부를 둘러보면 더 좋을 테지만, 입구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 나왔다.



내일이면 짧은 일정 때문에 부르고스까지 가서 버스로 약 250km 구간을 점프해야 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약 500km 이상 걷는 것이니 처음 순례길치고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고 다독이며 조금이라도 더 걷고 싶어 발길을 더 재촉했다.
그래서일까, 부르고스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그만 날은 저무는데 또 다시 숙소는 못 찾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보통은 이메일이나 호텔앱 등을 통해 사전에 예약하거나 알베르게가 열었는지 확인하고 갔는데, 오늘 목적지로 삼은 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Cardenuela Riopico)에 알베르게가 여럿 있다보니 그중 하나는 열었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달려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교적 높은 산을 하나 넘고 내려오는 길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은 넓은 평원에서는 잘 안 보였다. 한참 헤매다 구글맵 등으로 찾아가보니 마을은 다소 우회로에 숨어 있었고, 결국 마을까지는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마을 입구에 한글로도 쓰여져 있는 알베르게 정보를 발견했을 때까지도 별 문제는 없었다.
가는 알베르게마다 문이 닫았을 때 그때 비로소 문제가 발생했다. 작은 마을을 여러 번 왔다갔다 해도 아무리 해도 연 알베르게는 눈에 띄지 않았고 공립 알베르게는 아예 문을 굳게 닫고 아무리 두드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인근에 불빛도 눈에 띄었는데 정말 없던 건지, 아니면 영업만 안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잠자리를 찾지 못한 순례객의 입장에서는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찾게 된 한 레스토랑 알베르게. 레스토랑에서 알베르게도 겸하는 곳으로, 일반 알베르게 중에는 이런 곳이 의외로 많았다. 밥도 먹고 딸려 있는 알베르게에 가서 잠도 자고, 주인 입장에서는 매출도 올리고 순례객 입장에서는 한곳에서 다 해결할 수 있으니 간편했다.
알베르게 아주머니는 스페인 사람은 아니었다. 아들아이 하나와 함께 살고 있는 듯한 그녀는 스페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스페인어 외에는 말하지 못했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 했다. 어찌어찌해서 저녁까지 세탁까지는 해결했지만, 건조기에 넣은 세탁물을 알베르게 침실 입구에 가져다준다는 말만 믿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새벽에 빨래를 챙기러 일어났을 때에는 세탁기가 있는 레스토랑 부분으로 가는 문은 잠겨 있었고 결국 나는 늦은 출발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서 빨리 출발하라는 듯한 불친절한 그녀의 모습에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런 상황이 연출되긴 했지만, 알베르게 자체는 최근에 새로 지은 듯 꽤나 깔끔하고 여러 개의 2층 침대가 있는 객실이 연달아 붙어있는 꽤 큰 알베르게였다. 하지만, 이 큰 건물에 나는 혼자였다. 저녁을 먹고 레스토랑 주인까지 퇴근하는 듯 나가버리자, 불을 끈 알베르게에 적막만 흘렀고 나는 추위도 그랬지만 혼자 남은 마음에 이리저리 꽤나 늦게까지 뒤척이다 잠들었다.


여름, 그 많은 포도의 기억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 산길에는 이런저런 조각물이나 순례자들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여러 방향으로 나 있는 한 이정표. 나는 어디로 갈까.



아마도 포도 잎사귀가 아직 푸르렀던 여름에는 이 방의 크기에 맞는 많은 순례자들이 지금은 비어 있는 저 침대들을 가득 채우고 신나서 밤늦게까지 떠들었을 것이다. 해가 늦게 지는 유럽의 여름 특성상 더구나 젊은 순례객들이라면 처음 만난 외국 순례객들과 얘기를 하고 쉽게 친구가 되느라 빠른 잠을 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많은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비어 있는 침대에 기억 하나씩을 매어 놓고 다시 가슴에 기억을 채우기 위해 아침 순례길을 서둘러 떠났을까. 비어 있는 침대에 비어 있는 기억들 하나, 달빛 속에 푸르스름하게 나타날 것 같은 여름 순례객들의 표정들, 기억들. 나는 그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려, 내 것은 아니지만 꽤나 소중했을 그들의 환영이라도 잡으려 애쓰다 그렇게 피곤한 눈을 간신히 붙이고는 잠들었다. 어쩌면, 내 기억 하나도 오늘 내 고단한 몸을 누이는 이 침대 한 자락 어딘가에 묶어 두려고 꽤나 발버둥치면서 말이다. 고요한 11월 중순, 스페인의 차가운 늦가을 밤에.

레스토랑에 딸린 알베르게에는 참 객실과 2층 침대가 많았다. 저 많은 침대들은 모두 여름이면 가득했을 순례객들의 기억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거기 내 기억 하나도 묶어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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