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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Apr 09. 2024

내 어릴 적 꿈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던 이유




 얼마 전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지내는지 물으셨지만 할 말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하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하나씩 지우다 보니 할 수 있는 이야기의 개수가 적어진 탓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일을 안 다니니까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가보네."


 사실이다. 아무래도 백수의 삶보다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하는 편이 이야깃거리가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 동시에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백수지만 바깥 활동을 꽤 많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에게 내가 하는 활동들을 하나하나 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엄마는 분명 내가 하는 활동 중에서 '쓸모없는 짓'들을 가려내어 지적하고, 훈수를 둘 것이었기 때문이다. 생산적으로 살지 않는다는 잔소리는 덤으로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지적을 받지 않기 위해 말을 가려했음에도 그날도 어김없이 훈계가 따라왔다. 동생 때문이었다. 엄마 친구 아들 딸들은 한 번 만에 턱턱 붙는 시험을 몇 년째 붙들고 앉아 있는 그는 공시생이다. 집에 겨울잠 자는 곰처럼 틀어 박혀 있는 동생을 참아주느라 속이 터질 것 같을 때면 엄마는 내게 하소연을 하곤 했다. 들어줄 사람이라곤 큰 딸인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힘이 되어야 할 배우자인 우리 아빠는 본인이 더 열이 받아서 난리 칠 것이 분명하므로 적절한 논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무뚝뚝한 아들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이 분명하므로.


 문제는 이 이야기가 하소연으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이야기는 나의 생산적이지 못한 삶까지 흘러갔다.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왜 투자한 만큼의 효율을 내지 못하니.' 다른 집 애들은 알아서 척척 하던데 너는 왜...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울분에 젖어들었다. 나의 생산적이지 못했던 과거부터 현재까지가 일일이 파헤쳐졌다.







 엄마를 이해한다. 그래서 엄마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꾹 참고 들어주려 한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는지 안다. 나 같아도 그 정도로 머리 싸매고 자식을 위해 노력했으면 억울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엄마, 엄마가 말하는 그 혼자서 척척 잘하는 아이들 집은 허구한 날 부모님이 소리 지르고 물건 집어던지며 싸우지 않았잖아. 가족 여행도 자주 가고, 여행 가서까지 싸우지도 않았잖아. 걔들 어렸을 때 그 집 부모님이 얼마나 애지중지 왕자, 공주처럼 사랑을 잘 표현하며 키웠는지 나도 한 동네 살면서 봤다고. 엄마 아빠가 우리한테 그랬던 적 있어?' 하고.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나는 가족 식탁에서 마음 편하게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엄마 혹은 아빠가 속상한 날이면 눈치 없이 굴다가 괜한 화풀이를 당하기 일쑤였고, 그 내용은 도저히 어린아이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던 적이 허다했다. 나는 '땅 속에 들어가라(=죽어라)'라던가 '너는 왜 태어나서 나를 애 먹이냐. 더럽게 운이 없으려니 저런 게 자식으로 태어나네.'와 같은 말들을 다른 집 애들도 들으며 사는 줄 알았다. 부모님이 부부 싸움을 하면 거의 몇 주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빠가 나에게 달려들어 엄마 욕을 해댔다. 재수가 없으려니 저런 걸 만나서 결혼을 했네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댔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그런 순간순간마다 나와 동생은 서로의 곁을 지키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곤 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물려받은 재산 한 푼 없이 시작해 자가와 자동차를 구입하고 자식 둘 까지 대학 공부를 시켰다. 그 과정에서 있었을 노고는 절대 단 하나도 폄하하고 싶지 않다. 아홉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나 몰라라 하는 형제들과 아무런 힘도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고아처럼 살아야 했던 아버지와 국민학교 시절부터 가족들 밥을 차려야 했던 어머니는 그분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나와 동생을 키웠다. 사랑 표현이 잘못되었다 한들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수없이 절망에 빠지더라도 나와 동생은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아빠가 마련한(엄마도 적잖이 일조했지만) 보금자리에서 엄마의 따뜻한 세끼 밥상을 받으며 탈선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한 사랑이 필요했던 것 같다.





 


 엄마는 딸이 전문직을 가지길 바라셨다. 아빠 또한 여느 평범한 서민 가정 부모들처럼 딸이 간호사, 공무원 등의 안정적인 직장을 갖길 바랐다. 빠릿빠릿하고 싹싹하게 사회생활 잘해서 남들에게 욕먹지 않고 사회에 잘 적응하기를 너무나도 바라셨다. 십 대 시절부터 고아처럼 자라오며 일머리 없다고 먹은 욕 때문에 한이 쌓이셨는지, 아버지는 자신과 닮아 감성이 풍부하고 몽상가 기질이 있는 내게 틈날 때마다 충고를 하셨다.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집에서 욕을 먹는 게 낫지 사회에서 욕을 먹으면 죽을 만큼 괴롭다,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네가 사회에서 욕먹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너처럼 굴다가는 시집가서 남편한테 소박맞는다, 너 같이 집안일 못하고 게으른 애를 데려갈 남자가 불쌍하다, 너처럼 꿈속에서 살다가는 사회에 나가서 피눈물을 흘린다, 우리 집안 형편을 보고도 돈 안 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넌 참 이기적이다 저렇게 시근 머리가 없어서 누구한테 사랑을 받을까.... 등등.


 자식이 사회에 나가서 욕먹지 않고 남편에게 소박맞지 않기를 바랐던 아빠의 마음과는 달리 내 마음속에는 허탈함만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사회란 힘들고 피눈물 나는 곳이라는 관념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부터 단단히 형성되어 버렸고, 나는 이미 태생부터 글러 먹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뼛속 깊이 뿌리를 내렸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한 부모님의 기대에는 영영 맞추지 못할 텐데 살아야 할 이유가 대관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이 어린 사람답게 새로운 꿈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를 때도 있었지만 뭐든 조금 진척이 있을 때마다 지레 겁먹어서 발을 빼기 일쑤였다. 겨우 스무 살 때 이미 내게는 젊은이 다운 포부도 자신감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한 번 마음속에 생긴 공허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물이 채워지지 않듯이. 어릴 적 부모님의 반목과 아빠의 폭언에 시달릴 때마다 늘 그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평온한 곳을 꿈꿨다. 말과 표정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 스스로 검열하지 않아도 되는 곳, 눈치 보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곳, 싸우거나 시비 거는 사람이 없는 곳......



 투자한 만큼의 효율을 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엄마의 답답함을 들었던 그날 저녁, 나는 마룻바닥에 누워 퇴근한 짝지(신랑)의 컴퓨터 게임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뭐라고 쫑알쫑알 지껄여 대는 게임 캐릭터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옆을 돌아보니 물 빠진 듯 희끄무레한 황금빛 털이 보송보송한 우리 집 강아지가 가만히 앉아 우리 하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음속은 온통 엄마가 끄집어낸 과거의 감정들로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주변은 현재의 내가 이루어 낸 것들로 더없이 평온했다. 너는 왜 다른 집 애들처럼 못하냐고 한들 나는 이미 내 꿈을 이룬 것이었다. 아빠는 늘 말씀하셨다. 네가 (사회적인) 능력이 없으면 남편한테도 무시당하게 된다고. 그런 것이 부부 관계라고. 네, 알겠어요. 그렇지만 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닌걸요. 우리는 '진짜' 가족이라고요. 진짜 가족은 이해득실을 계산하기보다는 상대를 기다려줄 줄 아는 법이죠. 만에 하나 뒤통수를 맞는대도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이고요, 난 그저 지금의 평화를 즐길래요. 미래에 올지도 모를 불행을 대비하기 위해 현재를 전전긍긍하며 살지 않을 거예요. 살아보니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던 걸요. 엄마 아빠가 제게 했던 '조기교육'은 죄송하지만 효과가 전혀 없었군요. 제 마음속에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야'하는 패배감만 남겼으니까요. 덕분에 난 꿈꾸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패배주의적 인간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전 제가 타고난 대로 현실 감각 없이 꿈 꾸며 살아갈래요. 물고기가 원숭이처럼 나무에 오르려 하면 바보 같다고 비웃으실 거 아녜요. 저에겐 바닷속에서 충분히 헤엄치며 내 옆구리에 달린 지느러미가 물살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탐구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엄마 아빠를 일부러 애 먹이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답니다. 전 언제나 착한 딸이 되고 싶었어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음날,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 마음은 잘 알겠으나 과거의 일은 끄집어내지 말아 달라고. 어제오늘 너무 우울하다고. 엄마에게서 미안하다는 답이 왔다. 나도 '미안하다'라고 답톡을 했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엄마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참으로 미안했다. 마음속 패배 의식을 없애지 못하는 스스로에게도 미안했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짝지가 나를 숨이 막히도록 꼭 끌어안아 주었고 강아지가 근처를 어슬렁 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과 헥헥 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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