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이곳엔 달이 오십 개 뜬다.
공무원 시험을 어제 마친 친구에게 밥 한 끼 하자고 불러냈다. 훗날 저승과 이승의 문턱에서 천신이 내게 이승에서 축복받은 일들을 고하고 가라 한다면 그중 이놈의 이야기도 있겠지. 그만큼 내가 엇나가려 할 때면 다잡아주고, 헐벗은 나의 그 자체를 존중해 주었던 놈. 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려나. 반년이 조금 지나서 만나도 정겨운 얼굴. 오랜만에 만난 우리의 이야기는 생각보단 단출했다. 서로에 대해 너무 아는 게 많아도 문제다. ‘뭔 얘기를 하지?’라는 이런 탈이 발생한다.
“시험은?”
“아, 몰라. 망했다.”
“몇 문제 찍었는데?”
“영어 5개? 국어 4개?”
“아직 모른다, 그거 다 맞추면 합격이다.”
“다 맞추면 너 차 사줄게.”
“그럼 차 못 받겠네. 영어 1문제, 국어 1문제는 맞을 거야. 조건 그걸로 바꿔줘라.”
언제나 그렇듯 마무리는 어린아이의 정서를 담아서.
집으로 오는 길, 빗장뼈와 위쪽 가슴이 다 보이게 반 팔 셔츠를 풀어헤쳐놓고는 터덕터덕 걷는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하늘이 밤색이 되어간다. 짙은 청색으로 나에게 말한다.
“오늘 하루도 잘 보냈습니다.”
‘오늘은 정말 한 게 없는데’라는 생각과 동시에 십 미터 앞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너다.’
한발, 그리고 일 미터.
한발, 그리고 다시 일 미터.
한발, 그리고 다시 또 일 미터.
시선을 정면에 고정해 놓고선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운 채로 돌리지 않는 걸 보니 아마 나를 본 모양이다. 지금도 너는 멀리서 나를 알아보는구나, 나도 마찬가지인데. 앙다문 입술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간다. 곁눈질로 본 너의 표정을 보니 아직도 나를 용서하긴 어려운가 보다.
전과 달라진 사람이 된다면 망설이지 않기로 해놓곤 그렇게 멀어지게 둔다.
‘훠이 훠이’
우리라고 발음을 마음껏 굴려도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을 시절에, 하늘이 파래질 시간이면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나는 말했다.
“봐봐, 달 오십 개 뜬다고 했지? 보여?”
“뭐야 필라멘트 빛이잖아. 달빛이랑 약간 달라.”
“잘 봐봐, 이제 카메라를 흔들면 똑같지? 똑같은 빛이지? 우리는 지금 오십 달빛 낭만 아래 살아가고 있는 거야.”
오십 달빛은 개나 주고, 이제는 반 오십도 넘은 채, 그저 서로의 등만 마주 보며 지나갈 사이다.
그나저나 기승전결, 서론 본론 결론이라곤 하나도 없는 오늘 쓴 이 문장들의 배열도 글이라 말하려면 제목을 지어줘야 하는데 뭐라고 지어야 할까. 마음 같아선 ‘너를 만나러 가는 녘’이라 칭하고 싶은데 우리 사이를 보면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무제라고 말하기엔 큰 뜻을 품어 아직 손을 대지 못한 제목 같고. 또 무죄라고 말하기엔 방금 너의 표정이 아른거리고.
“무죄라고 한 번만 말해주면 안 될까요?”
그래, 너다. 제목.
부제는..
“잘 지냈어?” 이 말은 너무 뻔하고, “여전히 이곳엔 달이 오십 개 뜬다.”라고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