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나에게 폭력을 가르친 건 다름 아닌 당신이었다.>
독서 모임에서였어요. 어쩌다 나온 이야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선생님들께 죽도록 맞은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어요. 다행스럽게도 저에게는 `죽도록 맞은` 기억은 없더군요.
"나는 운이 좋았나 봐요. 학교가 좋았던 건가..
그렇게 맞은 적은 없어요.
"아... 아니다... 아니구나."
마치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어요.
너무 끔찍해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 아무도 없는 교실 벽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선생님은 바퀴 달린 의자를 쓰윽 밀고 내 앞으로 와요. 의자에 앉아 있는 선생님의 벌린 양다리 사이에 내 몸이 알맞게 끼워지고, 선생님은 친절하게 내 안경을 벗겨 옆에 둬요. 그리고는 양손으로 내 두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해요. 몇 대쯤 맞았는지는 도무지 셀 수도 없어요.
이제 끝났나 싶을 때, 선생님은 내 머리 양쪽을 움켜쥐더니 뒷벽에 수차례 박아대요. 어렴풋하지만 나는 비명을 질렀던 것 같아요. 나도 들어 본 적 없는 내 목소리가 빈 교실을 울려요. 잘못했다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내가 정신을 잃을 때 즘, 선생님은 반성문 쓸 하얀 종이와 팬을 옆에 두고는 교실 밖으로 나가요.
그리고는 문 밖에서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가요.
그래요, 내가 뭔가 선생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겠죠.
내 기억으로는 당시 나는 향수를 좋아했고, 정말 열심히 용돈을 모아 향수를 샀고 그걸 학교에 가지고 갔다가 선생님께 빼앗겼고, 내 것을 돌려주길 바라는 소극적인 제스처를 취했던 것 같아요. 내 거니까.
남의 걸 왜 가져가?
내 돈 주고 내가 산거잖아. 교칙 어디에도 향수를 학교에 가져오지 말란 말 없잖아. 사람을 다리 사이에 끼워 놓고 정신 놓을 때까지 패면서, 그 사람 비명소리 들으면서 너, 무슨 생각 했냐?
그러다 어떤 학생한테 고소당했지?
매일매일 나처럼 후두려 맞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다 너 때문에 학교 가기가 고통스러웠거든.
어느 날 저녁 티브이 뉴스에서 너를 보고는 밥숟가락 내려놨다. 역겹더라.
`학교 폭력 근절 캠페인` 대표로 왜 네가 앞장서 나와?
바로 네가 학교 폭력의 선두주자인데, 이 양아치 새끼야!
PS. 90년대 중학교의 이야기라는 걸 적어둬야겠어.
당시 우리는 네가 애들 하나씩 데리고 들어가 패던 저 빈 교실을 고문실이라고 불렀었고.
그럼 넌 뭐야?
지각했어요. 듣기 싫으시겠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신 교감 선생님의 호출에 따라 다들 아침 일찍 등교했어요. 책가방은 교실에 두고 동아리실에 모였고, 선생님은 꽤나 오랫동안 말씀하셨어요. 그래도 부족했는지 조례시간이 다가와 안절부절못하는 우리를 앞에 두고 괜찮다고, 선생님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시며 조금 더 말씀을 이어나가셨죠. 수업을 알리는 종이 쳤고 그제야 선생님도 말씀을 멈추셨어요. 우리는 교실까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이 문제는 교감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직접 해결하실 부분인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럴 리가요..
선생님은 저와 친구를 교무실로 불렀고 야단치셨죠. 저는 계속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 문제는 교감 선생님하고 직접 말씀을 나눠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요, 제가 늦긴 했는데, 그건 참 송구스러운데 저도 할 얘기가 있긴 하고, 그래도 담임선생님이 우선인 것 같아서 무슨 말씀 하시는지도 잘 들어봐야겠고. 해서 경청하고 있었거든요. 경청한다 함은 선생님을 바라보고 말씀에 집중하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는 거죠. 진심으로요.
그런데 선생님은 갑자기 소리치셨어요.
"넌 뭘 잘했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 싶어 옆에 있는 친구를 봤어요.
친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는 푹 숙이고, 눈썹은 팔자로 만들고, 입술을 꾸르 말고 서 있더라고요.
그때, 알아차렸죠.
'아, 저게 선생님이 원하는 반성의 표정이구나.‘
친구처럼 저런 표정으로 서 있어야 어른 말 잘 듣고 반성 잘하는 착한 청소년으로 인정받고, 이 일도 조용히 넘어가겠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두고, 선생님은 친구를 먼저 교실로 보냈어요.
그리고 저에게는 반성문 한 장을 가득 채워 써오라 하셨죠.
하얀 A4 용지를 앞에 두고 잠깐 고민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써 내려갔습니다.
조례시간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다른 것에 대해서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꾸중하실 때 고개 숙인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고 좋아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금 알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것이겠지요. 선생님이 어서 고정하시길. 목소리가 충분히 크니까 좀 낮추어 주시길. 나랑 제발 눈 마주치지 말길. 빨리 종이 치길.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된다면, 매점 가고 싶다. 뭐 먹지? 학교 끝나고 은혜 분식 가서 떡볶이랑 김말이 먹어야지. 조금 더 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된다면, 아. 무. 생. 각. 없. 음.
그래도 여전히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제 정수리를 보는 것이라면, 도대체 왜 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제가 왜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면 안 되는 건지, 왜 경청하며 혼나면 안 되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선생님께는 어떤 답변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우리가 따로 볼 일은 없었죠. 어쩐지 저는 서운했습니다.
5월이 왔습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부모님께 편지를 쓴다. 다 쓴 편지는 봉투를 봉하지 않고 제출한다.
내가 읽어 본 후 돌려주면 부모님께 갖다 드리도록 한다.”
저는 고심해서 고른 노란색 편지지를 펼쳐 놓고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곧 한 문장을 썼습니다.
‘선생님 모부님께 드릴 편지는 제가 알아서 모부님께 쓸게요.’
PS. 난 진짜 모르겠어요. 왜 선생 싸움에 내 등이 터져야 하는지. 왜 선생은 내 정수리를 보고 야단치고 싶어 하는지. 왜 내 부모님 전 상서를 선생이 보려 하는지.
글/그림 : 두시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