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언제 이 더위가 가시나 올여름은 왜 이렇게 더위가 오래가나 싶었는데 한 순간에 가을이 아닌 겨울이 찾아온 것만 같다. 4계절 중 겨울은 유일하게 연말과 연초를 함께 포함하고 있어서 뭔가 더 애틋하고 그리워지는 계절인 것 같다. 365일을 1년이라는 시간으로 규정하고, 그 해가 지나면 나이가 든다는 개념을 만들어낸 인간 덕분에 우리는 매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 같다.
올해는 어떻게 살아내었는가? 뭐,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지만 사실 남은 시간도 지나간 시간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소심한 반항을 해 본다. 나에게 올해는 정말 열심히 일 했던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2월부터 승진을 하여 매일 야근을 해야 하는 업무에 시달렸던 게 벌써 9~10개월이 되어 간다. 아마 내년도 이렇게 보낼 것 같다.
열심히 일 했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글 쓰기는 거의 하지 못했다. 여행기를 써 보겠다고 몇 달간 열심히 썼지만 왜인지 항상 여행기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가진 문체로 다채롭고 색달랐던 여행을 표현해 내는 게 항상 힘들었다. 그게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여 결국 끝까지 가지 못하고 잠정 중단된 것이다. 계속 쓸 수 있지만 사실 동력을 잃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열심히(?) 꾸준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로서의 활동이다. 독립출판을 한지도 벌써 4년이 넘어간다. 지금까지 총 2권의 책을 냈지만 작년부터는 아직 신간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러니 뭔가 작가라고 불려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매번 북페어를 나가면 다른 동료 작가님들은 새로운 신간을 잘 내시는데 정작 나는 아직도 '은행경비원' 책만 가지고 나오니 살짝 낯부끄럽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마음이 쫓기거나 부담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원래 남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 것보단 스스로 이제 내 글을 쓰고 싶고 또다시 책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게 내 안에 있다는 걸 느낀 것이다.
오랜만에 또다시 북페어를 나섰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내 책을 짚어 펼쳐 보시는 분들에게 책에 대해 설명을 해 드렸다. 그런데 이번엔 유독 설명 앞에 이런 말을 덧붙이게 됐다.
"오래전 이야기예요."
하필이면 또 성수동에서 행사를 해서 은행으로 출퇴근했던 거리들이 눈에 들어와서 그런지 조금 더 설명을 잘할 수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의 나는 이랬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나와는 다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참 힘들고 어렵고 많이 불안했지만 그만큼 가슴속에는 부픈 꿈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상황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항상 책과 글을 옆에 끼고 살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에 비해 현재는 매달 나가는 월세도 없고, 월급이 적어 매달 말일이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돈이 없어 새벽잠을 쪼개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돈이 없어서 애써 나가지 않는 일도 없어졌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되었고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은행경비원 시절만큼 부픈 꿈이 있냐는 물음에는 글쎄...라는 답이 나온다. 그렇다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글을 못 쓰고 있다고 동료 작가님께 말하니 "다시 은행으로 돌아가면 은행 경비원 시즌 2가 나오겠네요. 하하하...?" 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순간 상상이 됐는데 아찔했다. 그리곤 말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하고 말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꼭 한 번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아마 내 책을 봤다면 누군지 아실 수도 있을 것 같다. 직장에서 만난 좋은 사람은 그 시절 나에게 있어서 힘든 일상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존재였다는 걸 지나고 나니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는 조금 부족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분은 정말이지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지안에게 박동훈이 있었던 건 단순히 우연이 아니었듯이, 나에게 있어서도 그분은 우연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비정규직인 나에게 정규직인 그녀가 보인 호의는 단순히 내가 가여워서가 아닌 그냥 그 사람 그 자체였을 테니까 말이다.
3일간 행사를 치르며 혹시나 그녀가 이곳을 방문하여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어떤 마음일까?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상상을 함과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꼭 좋은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던 그녀의 마지막 말을 다시금 곱씹어 보며, 잘 지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이다.
올해가 지나면 지난날은 더 과거가 되어 간다. 지나간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미 기록되어 있는 과거는 계속 되뇌게 되고 현재의 나와 계속 비교를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현재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글이라는 게, 책이라는 게, 무언가를 세상에 남긴다는 게 이토록 무섭고 또 대단한 일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그래서 더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더더 해 보고 싶기도 하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살아낼 수 있게 만든 인공호흡기 같았다. 끝까지 버틸 수 있게 만들어준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에게 유일하게 하고 싶고 해 보고 싶은 일이었다. 가장 잘하는 건 말하기이지만 가장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건 글쓰기가 아닐까 싶다. 어쩌다 이렇게 좋아지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냥 원하는 것들을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어디까지 갈 진 모르지만 계속 나아가 볼 생각이다.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지 못하기에 그게 무엇이 되던 일단은 가봐야겠다. 부디 더 나은 내가 되어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