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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Dec 17. 2020

꿈의 요람 3

성으로 돌아온 로제는 구 도서관 건물로 향했다. 신관이 작년에 개설되어 이젠 고문서들이나 쌓여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창고가 줄지어 늘어선 복도를 지나 외곽 관리인 숙소로 가자 벽지와 공구, 아직 들이지 않은 가구들이 보였다. 공사의 흔적을 보며 로제는 이 건물에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겠구나, 생각했다.
 
막 거실 정리를 끝낸 키하다가 로제를 반겼다. 키하다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해서 은퇴식 이튿날부터 자신에게 허락된 자택의 공사를 시작했다. 벽면을 메운 책장을 배경으로 평상복을 입은 채 서 있는 키하다는 전장에서와는 다른 활기를 띄고 있었다.
 
“잠깐 앉아라, 로제. 대부님이 차를 끓이고 계시니까. 거실만 이렇지 주방은 엉망이니까, 들여다볼 생각은 말도록.”
 
“엉망이란 건 아는 가보구나. 조금 있다 다시 시작하자구. 어서 와라, 로제. 전하고 오느라 수고 많았다.”
 
크고 거친 손에 다과상을 얹은 블루벤이 주방에서 나오며 반갑게 맞이했다. 신혼 준비는 부모와 함께 하는 것이 이 나라의 관습이었기 때문에 블루벤은 장기 휴가를 낸 상태였다. 셋은 긴 안락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차를 드는 와중 아직 가봉하지 않은 의자가 로제의 눈에 띄었다. 안락의자와 비스듬히 바라보는 각도로 놓여있는, 어른의 키에 맞춘 흔들의자였다.
 
‘이곳이 앞으로 키하다님이 생활하실 저택..’
 
로제는 찻잔에 입을 맞추며 서재를 겸한 거실을 둘러본다. 30평 남짓한 공간. 동선과 관리를 고려하여 꼼꼼하게 배치된 가구들 사이로 아기자기한 소품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일에 있어서 치밀한 키하다의 성품과 함께 타인을 배려하는 친절함의 증거.‘최소한..비슷한 연령대이기만 했어도.’반려자를 향한 그 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는 너무나 어린 소녀였다.
 
“차가 맛이 없느냐? 왠 고민이 그리 많으냐?”
 
옆을 돌아보았을 때 블루벤이 상처로 얽은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흘려보내듯, 로제는 찡그린 미간을 피고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그렇게 예쁜 얼굴은 함부로 찡그리는 게 아니야. 난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전장에 나서면 늘 긴장해야 할 텐데. 이럴 때라도 좀 웃어 두거라.”
 
빈 찻잔을 채워주며 키하다가 짧게 설교했다. 나이에 비해 늙은이 같은 어투인데도 로제에겐 별 어색함이 없었다. 사춘기 소년 시절,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었던 목소리였으니까.
 
“일이 바쁘셨을 텐데, 단검을 직접 만드신 겁니까?”로제는 화제를 바꾸었다.
 
“아아. 대부께서 그게 예의라고 하셔서. 낮엔 일하고 밤에 거기에 열중했지.”
 
“아마 그 저택엔 나와 같은 부족 사람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의미를 설명해주었을 거야.”블루벤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예. 그런 눈치였습니다.”
 
길쭉한 싸구려 초가 녹아 가면서 이따금 검은 연기를 토해낸다. 그 탄내에 방해 받지 않고 차 향기를 즐기는 세 사람. 그들은 사제의 인연으로 묶인 가족이었다. 블루벤은 열여덟 살의 키하다에게 부모의 정을 주었고, 로제는 9년의 성장기를 키하다의 견습전사로 자랐다. 이들의 민족과 외견에서 아무 공통점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일체감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는 장식과도 같았다. 요새를 향해 출발하는 로제를 배웅한 후, 남은 두 사람은 주방 정리를 시작했다.
 
에드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빵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그 시각에. 앞치마를 두른 키하다는 낡은 화덕에 낀 먼지를 걷어내고 있었다. 분주히 작업에 열중하고, 때때로 농담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블루벤은 자신의 양자. 키하다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정말로...괜찮은 거냐?”
 
이후 몇일 동안 블루벤은 몇 번이고 이 질문을 되풀이했다. 돌아오는 것은 조용한 웃음뿐이었기에, 블루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결혼식 전날. 신부 측에서 예물이 도착했다. 각기 다른 형태의 은사슬 108개를 연결한 섬세한 수공예품이었다. 정육면체로 동일하게 세공한 사파이어와 루비가 양 끝에 따로 메어져 있어 한번 겹쳐 목에 거니 두 보석이 가슴께에서 하나로 만난다. 대부분이 부모에게 물려받는 이 나라의 전통적인 결혼예물이었다. 블루벤은 결혼 목걸이를 목에 건 키하다를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막 군단장에 되어 젊음과 사명감. 위엄을 몸에 두른 양자의 모습에서. 부모의 감상으로 떠오른 그 모습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가슴 뿌듯한 대견함을 느껴야 했는데. 이 순간 블루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또 한번의 질문이었다. 괜찮은 거냐. 그 질문에 키하다는 예전보다 조금 더 길게 답했다.
 
“블루벤. 대부는 제가 훼라 크렘에 입단하기 전 저와 마주친 적이 있으셨죠. 아무도 믿지 않고..죽는 게 두려워 죽이는 것 밖에 알지 못했던 저를. 당신은 근본도 모르는 고아인 저를 거두어 이름을 주셨고. 자식으로 대해주셨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보답하고,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전 싸워왔습니다.”
 
키하다는 목걸이의 보석을 손에 꽉 쥐었다. 마음 안의 검은 바람을 억누르듯, 손등의 핏줄이 가늘게 떨렸다. 숨겨왔던 굴욕감이 이성을 무너뜨릴 듯 집요한 촉수를 휘감는다. 지난 9년간 천출의 핏줄이라는 멸시에 여의치 않고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그에게 나라가 준 것은 굴욕적인 명령. 은혜 갚음이란 구실로 참아 넘기기엔 너무나 큰 모욕이었다.
 
“이 결혼으로 섭정과 그 아래 측근들이 원하는 건 무엇일까요. 제가 분에 못 이겨 어린 소녀를 학대하고, 상대 가문이 괴로워하는 걸 보는 걸까요..그들은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겠죠. 풍문이라도 들리면 역시 천한 것은 어쩔 수 없어. 비웃음이나 보낼 런지, 또 한 번 싸워주지요. 절개를 품은 은퇴 군인으로서. 흠잡을 곳 없는 태도로 살겠어요. 그게 저의 새로운 적들과 싸우는 방법이라면.”
 
블루벤은 적지 않게 놀랐다. 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의 아들은 지금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토라진 채 고집을 내세우는 성장하지 못한 어른. 블루벤은 키하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맞춘다.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 키하다. 너는 아주 성숙하고 훌륭한 젊은이야. 그런 네가 다른 이를 해칠 리가 없어! 물론, 네가 많은 이를 죽여온 건 사실이지..하지만 우리는 전사야. 장담컨대 네가 쌓은 시체가 산이라면. 내가 죽인 사람들은 하늘까지라도 쌓여 있을 거다! 그것에 연연하지 마라. 비록 살인자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의무와 법도를 지켜야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법. 너는 왕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신하로서 당연한 일이야. 앞으로 그 소녀와 지내는 시간은 너에게 또 다른 성장을 위한 계기일 뿐이야. 더 이상..네게 싸움은 없는 거다.”
 
“당연..하다고요? 세상에 당연한 게 있을까요? 당연한 것이 있다면, 그건 제 마음 안에 있는 이 검은 마음이겠지요.”슬픔이 서린 살아있는 눈. 렌즈가 덮은 죽은 눈. 두 눈 모두 파란 빛을 띄고 있었다. 블루벤은 닮은 듯 다른. 아들의 두 눈동자가 똑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삶을 몰라요. 아시지 않나요? 제 과거를..이 대륙에서 죽일 줄 아는 자는 귀한 상품이죠. 전 창녀의 아들에 아버지는 수도 없죠. 귀족. 용병. 군인들..그들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제 가치를 알아보고, 몇 번이고 팔아치웠어요. 제가 왜 블루벤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지 아세요? 당신에게만큼은..대부에게는 어떠한 의심도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제가 지금껏 아버지라 불러온 자들이 제게 준 것은 오직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그리고 결국은 저를 팔아넘기는 배신감뿐이었으니까요. 전 싸워야 해요. 적이 필요해요. 이 나라에 와서 지내는 세월 동안에도 저는 모욕감과 분노. 자포자기에 맞서 끝없이 싸워야 했어요. 미워할 존재가 없으면..공포가 없으면..저는. 견딜 수가 없어요..”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블루벤은 키하다를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마음 안의 상처를 보여준 아들을 품에 안고. 마음껏 눈물을 흘릴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속삭여 주었다. 가여운 것. 가여운 것.
 
“키하다. 고맙다. 난 이렇게 자랑스러운 아들을 둔 것이 너무나 기쁘다. 그런 상처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네 책임을 다해왔었구나. 넌 그것만으로도 어른이다. 아주 큰 어른이야! 네가 부르고 싶은 데로 날 부르거라. 난 행복하다. 이 나라의 귀족들. 왕. 아니, 신이라도 지금의 나만큼 행복할 수 없어! 그래, 싸우거라. 나약한 너 자신과...끊임없이. 끊임없이 싸워서 앞으로 나가는 거다. 난..너를 이해한다. 단지, 그것만 기억해 다오. 내..아들아.”
 
두 사람이 서로를 안은 채 울고 웃을 때.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찾아왔던 로제는 베일을 벗을 겨를도 없이 문 뒤에 숨어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자신을 키워준 키하다와 그를 키운 블루벤의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었다. 왕위계승권없는 왕족으로 십년 세월을 무관심 속에서 살아온 로제였다. 키하다의 마음 속 새겨진 균열, 매우려 할수록 더 깊이 파이는 고통을 눈시울이 저리도록 알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키하다는 로제 앞에서 늘 강하고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음안의 상처를 참아가며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던 것이다. 몸을 떨게 하는 이 죄송스러운 감격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블루벤의 말도 진실임이 분명했다. 그 사실이 로제를 기쁘게 하고, 또 슬프게 했다.
 
얄궂은 일이다. 결혼식 전야. 굴욕적인 이 시간이 세 영혼 사이 숨겨왔던 감정의 해후를 이루는 계기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 때. 리버레인 가문의 저택에선 몇 일째 이어지던 어수선한 공기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다. 결혼 예복을 직접 맞추느라 재봉도구들이 어지러이 놓여있고 한켠에 쌓인 옷감들이 재차 잘리고 접히기를 반복한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구나.”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에드나는 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밤 두세 시간 내내 옷을 입었다 벗었다. 이젠 의상실만 봐도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았다. 식구들의 시선을 의식한 어린아이는 함부로 행동한 사실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섬주섬 예복을 벗었다. 잔뜩 기가 죽어 혹여 구겨질까. 흠집이라도 나지 않을 까 불안해하는 딸의 모습. 에릭은 그저 말없이 방을 정리할 뿐이었다.
 
“에드나. 방으로 가 있거라. 잠옷은 입어도 좋지만 잠들어선 안 된다. 나도 곧 가겠다.”
 
순간 화색이 돌았던 에드나는 잠들어선 안 된다는 말에 눈을 내리 깔았다. 그래도 입술을 비죽이거나 훌쩍이지 않고 부모님께 인사를 올린다.
 
‘조신하게..조신하게..머리가 뜨지 않도록..무릎을 굽히면서..’
 
며칠 사이 걸음걸이가 더 의젓해진 에드나를 흉내 내듯 머랭도 몸을 꼿꼿이 세워 그 뒤를 따른다. 유모가 에릭을 도우려 했을 때. 도라는 자신을 따라오라 부탁했다. 말없이 외면하는 에릭의 모습에서 유모는 미어지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방에 돌아온 에드나는 허물을 벗듯 평상복을 벗고 잠옷을 입었다. 침상에 올라 눕기 전에 옷을 잘 개어 접어논 것은 물론이었다. 요 며칠간 어머니와 유모는 옷 개는 법. 침상 정리 같이 소소한 일 하나하나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 주었고, 그 엄격한 목소리가 귀를 맴돌아 이젠 에드나 스스로 주변을 정돈할 정도가 되었다. 고작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잠들기 전의 침상이란 세상 가장 편안한 안식처. 에드나는 배를 깔고 누워 침상 다리에 기대앉은 머랭을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아진 늑대는 새하얀 털을 부풀리며 바닥에 등을 비빈다.
 
까르륵. 방안을 채우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이 작은 방은 에드나의 편안한 공간이었다. 가사 일의 고단함에 피로가 쌓이고 매일 같이 계속되는 공부에 지쳐도. 방에 돌아오면 매일 어머니가 햇볕에 말려주는 폭신한 침상이 반겨주었다. 이불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으면 어느새 아침이 되어 머랭이 잠을 깨워준다. 뽀송뽀송한 향기가 가실 날 없는 꿈의 요람에서. 에드나는 더할 나위 없는 유년의 천국을 누리고 있었다.
 
한창 머랭과 장난치고 놀던 중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어머니와 유모가 문에 서서 침상을 바라보고 계셨다. 언제부터 들어와 계셨을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않아서 노여워하신 걸까. 에드나는 후다닥 일어나 무릎을 모아 앉았다. 부끄러운 듯 침상 밑으로 들어가는 머랭의 긴 꼬리가 잠깐 시선을 가렸는데. 그 짧은 순간 도라는 수심 가득한 얼굴을 겨우 가라앉혀야 했다.
 
“가르쳐 줄 것이 있다. 중요한 것이니..잘 새겨듣도록 해라.”
 
유모는 에드나의 작은 책상의자를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그 자리에 앉은 도라는 잠시 숨을 고른다. 턱을 쇄골에 붙인 채 몸을 움츠린 에드나는 가여울 만큼 긴장해 있었지만, 지금 유모가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 대상은 냉정하기 그지없는 도라였다.
 
사실 이 시간에 모녀가 함께 있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일주일에 서너번. 도라는 자리에 누운 에드나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 어린아이에게 좋을 내용을 추린 신화와 전설이 주가 되었는데, 촛불에 비친 어머니를 보며 에드나는 신화 속 여신을 꿈에서 만나곤 했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그 때의 도라는 따뜻하고 편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들려주는 이야기는 적나라하고 잔혹한, 삶을 위한 진실이었다.
 
도라는 성장이 늦어 17살 때 초경을 맞았고 큰 두려움 없이 신체의 변화를 이해했다. 에릭과는 결혼을 일찍 했기 때문에 소꿉친구였던 신혼부부는 서로를 배려하며 차근차근 부모가 된다는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초경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딸을 달랠 기회도 없다. 신혼의 꿈에 부푼 딸에게 책임감을 가르쳐주는 당연한 시간이 부정당해 버렸다. 월경과 성교. 출산과 같은 여성의 숙명을 아무 여과 없이 설명하는 도라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갈퀴로 후벼 파인 그녀의 모성이 대신 피를 흘릴 뿐. 12살 딸에게 남자와 동침한다는 의미를 가르치고, 입덧과 피로. 유산의 공포가 머무는 10개월을 말해야 하는 33살 젊은 어머니의 심정을. 과연 짐작할 수 있는 것일까. 유모가 약이 담긴 유리병들을 가져왔다. 약용식물에 해박한 유모가 에드나의 안위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도라는 하나하나, 차분하게 설명했다.
 
“남편이 분노하였을 때는 이 약을 술이나 음료에 타서 건내거라. 곧 진정할 것이다. 격노하여 발작할 것 같다면 이 향을 뿌려 잠들게 하거라. 일시적인 것이니 두려워할 것 없다. 지나치게 우울해 자해의 기미가 보이면 이 알약이 도움이 될거다...”
 
혼란스러운 와중 어머니의 말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애쓰던 에드나는 어머니가 떨고 있음을. 위태로이 당겨지던 이성의 실이 끊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인 여인에게 이 이상의 고문이 있었을까. 어느새 도라는 에드나의 옆에 앉아, 창백해진 손으로 딸을 끌어안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성은 오직 딸의 무사함을 기도할 뿐.
 
“괜찮을 거야..괜찮을 거야..아무 일도..아무 일도 없을 거야..에드나..무서워 하지 말거라..”
 
에드나의 하얀 목덜미 위로 눈물이 떨어져 연약한 몸을 타고 흐른다. 그것은 그 어떤 웅변보다도 강하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에드나는 입을 꼭 다물어 우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작은 몸을 어머니의 몸에 더 바짝 붙일 뿐. 아이는 알고 있을까. 그 나약한 움직임이 슬픔에 빠진 어머니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와의 인연은..아가씨에게 좋은 만남으로 기억될 거예요.”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모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상대를 위로하는 어른의 지혜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녀를 감싼다.
 
“그가 보낸 단검..그 단검에는 사내가 자신의 힘을 아내를 위해 사용하겠노라는 의미가 있지요. 그의 대부인 블루벤님은 저희 부족의 수장이었던 분. 자신을 다스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저희 부족 인간으로 태어난 이들의 사명. 키하다님 역시 그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블루벤님은 진심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줄 아시는 분이니까요. 자아, 아가씨. 오늘은 부모님과 함께 자도록 해요. 내일이면 아가씨도 귀부인이 되시니까, 어린아이로서의 마지막 추억을 남기셔야죠.”
 
유모는 부드럽게 어머니와 딸을 방으로 인도했다. 자신의 손으로 키워온 소중한 여인들의 행복을 기도하면서.
 
바로 그 시각. 키하다는 블루벤과 등을 맞대고 앉아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동료에게 등을 맡긴 채 싸우는 전사들의 모습에서 유래한 자세로. 타인을 위한 배려와 자신에 대한 성찰을 논한다. 대부의 단조로운 듯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키하다는 어느덧 잠이 들었다.
 
꿈에서 키하다는 부러진 칼자루가 되어 황량한 땅에 박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고, 곧 맑은 강물이 되어 칼자루 주변을 부드러이 맴돌았다. 어느새 주변을 덮은 초원과 꽃을 바라보는 사이, 칼자루는 큰 나무가 되어있었다. 그 그림자가 어찌나 넓었는지, 꼭 세상을 전부 덮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고마운 강물은 언제까지나 나무를 감싸고 있었다.
 
꿈에서 깬 키하다가 창문 너머 바라보는 달빛. 하얀 은총이 부모 사이에서 잠든 에드나를 비춘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의 동행을 기다리듯, 시간은 고요하게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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