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아한 가난의 시대> 리뷰
나는 취준생이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에 49,000원 상당의 케이크를 샀다. 정가 53,000원에서 얼리버드 할인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 돈을 벌고 있기도 하지만, 수입 대비 무리한 지출임에는 틀림없다. 디저트류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는 통장 잔액을 걱정하면서도 에그타르트 두 개에 7,600원을 덥석 낸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는 참을 수가 없어 크렘브륄레 두 개에 11,000원을 헌납했다.(한번 살 때 다음번 것도 사둬야 안심이 된다)
김지선 작가의 에세이 <우아한 가난의 시대>는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그에 비해 값비싼 지출을 하는 현세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상대적으로)'라고 붙인 이유는 작가가 서문에서 '가난'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음에, 혹은 줄 수 있음에 부끄러워하고 조심스러워함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치를 부려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진정 가난하다 할 수 없다고 분노할 수도 있다. 나도 그러한 우려를 이해하고, 아래 쓸 글에서 실수를 할까 봐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이 책은 돈이 없다고 징징대거나 고급스러운 경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득 대비 소비 방식이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세대를 세심하게 고찰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우아한 과소비'쯤 될까 싶다.
아마 누구나 한 번쯤 '돈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많아?'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제일 싼 와인이 십만 원이 넘는 내추럴와인바가 만석일 때, 1박 가격이 몇 십만 원인 숙소가 세 달 전체 예약 마감일 때, 인터넷 쇼핑몰에서 백만 원 언저리의 코트가 품절일 때. 어디서 그렇게 돈이 나서 온 세상 값비싼 것들은 늘 웨이팅을 달고 사는지 신기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납득이 갔다. 취준생인 내가 무리해서 케이크에 오만 원 가까운 돈을 지출하듯이, 좀 더 여유가 되는(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버는) 사람은 내추럴와인바에, 고급 숙소에, 좋은 코트에 돈을 지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월급에 비해 과한 소비여도 말이다.
왜 그러는 걸까? 부모님의 뒷바라지 덕에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서일까, 철이 덜 들어 현실 감각이 없어서일까? 그전에 과소비에 대한 생각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최근 한 커뮤니티에 어떤 이(의사라고 한다)가 '세후 400 이하 오마카세 금지 법안 도입 시급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살기도 빠듯해 보이는데 무슨 오마카세야. 다들 정신 차리고 당장 예약 취소해라. 진짜 누려야 될 사람이 못 누리잖아.'가 그 내용이다. 진지하게 쓴 것인지 장난으로 쓴 것인지 어떤 지는 모른다. 그러나 뭐가 됐든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은 직후였다) 돈의 존재 이유는 재화나 서비스를 편리하게 구매하기 위함이지 구매 자격을 가르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착각하여 말한다. 이것밖에 못 벌면서 감히 이만큼이나 탐낸다고.
"삶은 힘들고, 일은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에, 가끔의 폭발적인 소비는 임금 노예로서 낭비하고 있는 시간을 보상해 준다. 왜 부자들이 모든 즐거움을 가져야 하는가?" -김지선, <우아한 가난의 시대>, 언유주얼, 2020, p.20.
한편 우리는 세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이렇다, MZ세대는 저렇다. 세대를 묶어 특징짓는 게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소비에 관해서도 젊은 세대 중 최대한으로 절약하여 돈을 모으는 '짠테크'를 실천하는 이들도 많다) 사회적으로 두드러지는 경향성에 대해 논의할 필요는 분명 있다. 더 위험한 것은 이를 무작정 비판하려 드는 것이다.
몇 년 전 호주의 부동산 재벌 팀 거너는 한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으깬 아보카도를 올린 빵을 사는 데만 20달러씩 쓰죠. 무슨 수로 집을 사겠어요? 안타깝지만 많은 사람들이 평생 내 집 마련을 못 할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젊었을 때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베지 마이트를 바른 빵을 생수와 함께 대충 씹어 넘겼다는, 매우 전형적인 레퍼토리를 덧붙였다. 젊은이들은 "그의 말이 맞다. 일주일에 20달러씩 아끼면 175년 뒤에는 집의 보증금을 모을 수 있다"라거나 "오늘 아침엔 으깬 아보카도를 먹지 않았다. 곧 집을 살 생각에 신난다"며 냉소했다. -p.21.
현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요즘 젊은것들은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써댄다고 말하기 전에, 평생 내가 지낼 보금자리를 남에게 빌리게 만드는 사회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 중 집값이 내려가길 바라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원인에서 좀 더 심리적으로 들어온 부분을 옮겨 적자면 다음과 같다.
… 반면에 21세기의 젊은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수치심이 아닐까 싶다. 인정할 수 없는 상사와 함께 일하는 고통. 그의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은 훨씬 더 적은 연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특별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서늘함. 그리고 미래를 잊기 위해 현재를 마취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오는 공포. 이 와중에 즐길 것들은 천지에 널려 있는 상황은 확실히 권태로움보다 수치심을 안겨 준다. 그러니까 오늘의 사치는 오늘의 수치심을 잊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p.21.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상황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는 그녀는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발가락에 반지를 껴 보거나 향수에 리본을 매달아 화장실에 걸어 놓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에게는 이런 장치들이 필요하다. -p.22.
나는 우리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부터 최근까지 내 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얼룩지고 찢어진 줄무늬 벽지 때문이다. 아마 방의 전 주인이 꼬마 시절부터 오랫동안 많은 걸 붙였다 떼었던 것 같다. 원 주인이 나가는 날이 우리가 들어오는 날이라, 이사 전에 도배를 하지 못해 부모님은 '나중에 하자'고 하셨었다. 하지만 벌써 여러 해가 지났고, 최근 내가 도배 견적까지 받아오며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머지않아 이사를 갈 것 같다며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집에서는 꼭 하얀 벽에서 살리라 다짐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모아두었던 포스터와 엽서들이 생각났다. 이 벽에는 붙여봤자란 생각으로 미래를 기약하며 상자 속에 넣어둔 것들을 여기저기 붙여 보았다. 당연히 말끔한 벽에 붙이는 것보다 안 예뻤다. 그래도 전보단 나았다. 요즘은 창문이 있는 한쪽 벽면을 가릴 생각으로 커튼을 검색 중이다. 스탠드의 하얀 조명도 노란색으로 바꾸었고, 종종 꽃을 두기 위해 꽃병도 샀다. 가만히 방을 바라보던 어느 날엔 우리 같이 힘내 보자, 라는 약간 웃긴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고 여기서 말하는 '우아한 가난'을 내 방에 비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젠가 더 어울릴 곳을 만나면 그때 붙이려고 상자 속에 넣어둔 포스터를 지금 꺼내서 붙여보는 것. 벽지가 영 마음에 안 들더라도 말이다. 그러다 보면 조명 색을 바꿔 볼까도 싶고, 꽃을 놓아 볼까도 싶어진다. '나중에 흰 벽으로 된 방에서' 하려던 것이 지금 내 방에도 꽤 어울린다. 어지르고 정 붙이지 못하던 지금의 방을 아낄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현세대를 아주 옹호하지도 비판하지도 않고, 어찌해야 한다는 말을 코앞까지 들이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부드럽게 보여준다. 우리의 과소비(인 것 같은 소비)는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로 모든 것을 유보하지 않고 현존하는 나의 품위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또한 상냥하게 권유한다. 그 소비가 목적을 잃고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해치지 않으려면 세상과 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선과 목소리로 둘러싸인 바깥과 거리를 두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서른여섯 개의 다양한 글로 구성된 책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잘 고독하고, 잘 알고, 잘 써야겠다.'
"내가 같은 질문(이 책을 얼마 만에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을 받는다면 책이 몇 페이지인지부터 볼 거예요. 515페이지네요. 나는 한 시간에 35~40페이지 정도의 책을 읽어요. … 그럼 이 책을 읽는 데 6일 걸리죠. 이런 게 '진짜로 아는' 거예요. 이게 나의 생활 패턴인 거죠. 생활 패턴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자신의 패턴에 대해서 모르는 채로 살다 보면, 내가 시간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날 지배해 버려요. … 자기를 모르면 시간, 타인, 혹은 상황이나 제도가 나를 지배하게 되죠. 그러다 보면 나는 끊임없이 평가받게 되겠죠. 이러한 평가가 열등감과 불안감을 촉발시키고요." -p.210.
나는 이제 내 방에서 전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 책상은 잔뜩 어질러 놓은 채 거실로, 식탁으로 노트북을 들고 옮겨 다니던 유랑 생활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포스터를 마주 보고 할 일을 한다. 물론 여전히 가끔은 마구 던져놓은 옷가지를 뒤로하고 식탁으로 도망가기도 하지만, 방을 아껴주며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낀다.
주말에는 여러 번의 에그타르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서교동의 가장 좋아하는 에그타르트를 네 개 사 올 것이다. 가격을 듣고 혀를 내두르면서도 맛있게 드실 어머니 것까지.(조금 깎아서 말하겠지만) 물론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외식을 줄이기도 하고, 쇼핑몰에서 낮은 가격순으로 상품을 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나는 현재의 나도 아껴줄 것이다. 소비로써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며. 우아와 가난은 반의어가 아니다. 천박과 부유가 공존할 수 있듯이 우아와 가난도 공존할 수 있다.
P.S. 배경 사진을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로 한 것은 '우아한 가난'이라는 말이 주인공 엘라이자와 너무나 잘 어울리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