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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인간 Dec 31. 2022

<솔라리스>에 관한 단상

1.

     <솔라리스>는 필연적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우주 공간에서 표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느린 호흡과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의 활용을 통해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겉모습만 유사해 보일 뿐, 둘은 완전히 다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작품이다. 언뜻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솔라리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우주 공간에서 서로의 등을 맞대고 선 뒤에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 완성한 영화라는 인상을 준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우주라는 미지의 공간에서 밖으로 발산해 나아가는 반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오히려 인간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2.

     이마누엘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인식 체계가 존재한다. 진리는 외부의 객관적인 대상을 그 자체에 맞게 인식할 때 포착된다는 진리대응론을 전복시켜서 주체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 체계를 문제 삼으며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일으켰던 것이다. 결국 세상이 구체화되는 방식은 인간이 그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마주하게 된 세상이 이전에는 본 적 없는 새로운 형태로 다가온다면, 더 나아가서 그 새로운 세상이 기본적인 파악조차 불가능한 백지의 상태로 나타난다면 인간은 그동안 세상을 구성해 오던 습관적인 방식을 내려 놓고 자신의 인식 체계, 즉 스스로의 내면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피사체를 촬영한 사진에 아무런 형상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피사체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 피사체를 촬영한 카메라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렌즈 케이스는 분리했는지, 조리개와 셔터 스피드 등의 노출은 적정한 수준이었는지를 점검하듯 인간은 자신의 인식 체계를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우주라는 도화지에는 내면의 환영이 채화되기 시작한다. 우주라는 그 끝없는 어둠, 그 '무한(無限)'한 '무(無)'에는 내면의 자아가 형상화된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합리적인 분석을 도출할 수조차 없는 혼돈이자 그 어느 것도 더렵혀지지 않은 순백의 상태인 만큼 크리스 켈빈의 내면은 보다 적극적으로 그곳에 표상되는 것이다. 그가 마주한 환영은 본인조차 자각하고 있지 못했던 그 자신의 존재 방식이다.


3.

     이마누엘 칸트는 또한 숭고라는 감각에 관해 고찰했다. 숭고는 인간이 일종의 무력감을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의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감각이다. 선박을 집어 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나 발을 잘못 내디뎠다가는 몸을 아작 낼 정도로 깊은 협곡 등을 볼 때 인간은 두려움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낀다. 이러한 경외심이 숭고의 기본 원리다.

     숭고가 인간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초라한 인간 내면의 도덕성의 가치를 역설하는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선박을 집어 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의 앞에서, 발을 잘못 내디뎠다가는 몸을 아작 낼 정도로 깊은 협곡의 앞에서 인간은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것들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도덕성을 발견한다. 그 위축되지 않는 긍지는 인간을 경탄하게 만든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감탄하게 되는 두 가지, 그것은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과 내면에 있는 도덕성이다.

     이러한 숭고의 개념은 코즈믹 호러의 원리와 닮아 있다.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는 인간이 '우주(Cosmos)'를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대응할 수도, 심지어는 이해를 시도조차 해 볼 수도 없을 정도의 무언가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경험하게 되는 무력감의 공포와 카타르시스를 뜻한다. 무력감이라는 근원적 공포와 카타르시스를 함께 동반한다는 점에서 코즈믹 호러는 칸트의 숭고 개념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체험을 일으킨다. 어쩌면, 인간 내면의 도덕성을 발견하기 위한 최적의 배경은 '우주(Cosmos)'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히로시마에서처럼 인간은 과학을 부도덕하게 하는 유일한 주체'라는 말로 '지식은 도덕성 위에서만 유효한 것'이라 말했던 헨리 버튼의 주장을 반박했던 크리스 켈빈은 우주 정거장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과학과 도덕성을 구분 짓던 태도에 변화를 겪는다. 그는 과학적 지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내면의 환영을 마주하며 도덕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우주를 마주하고 나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에게 우주는 파악 불가능한 대상이자 내면의 도덕성을 일깨우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4.

     우주는 Caos인 동시에 Cosmos다. 혼돈과 질서라는 이율배반적인 형태는 우주에 관한 핵심적인 단서다. 인간이 우주를 혼돈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의 질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인간이 그것을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여길 경우에 한해서 혼돈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만약 그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한다면, 우주는 간단하고 불변하는 몇 가지의 법칙들에 의해 작동하는 질서가 된다. 우주는 물리학자나 천문학자에게만 난해한 대상일 뿐, 일반 대중에게는 사유할 가치조차 없는 사소한 공간인 것이다. 마치 인생처럼 말이다. 오직 철학자들의 인생만이 고통스럽다.

     스나우트 박사의 말처럼 인간은 행복한 상태에서는 절대 인생의 의미나 영원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며, 결국 그러한 의문을 품지 않는 존재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인간에게 인생은 소박한 질서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은 행복하다. 그러나 의문을 품는 순간 인생은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생의 의미를 갈구하며 철학자가 되어 버린 인간에게 세상은 마치 물리학자나 천문학자가 되어 버린 인간에게 우주가 그러한 것처럼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대상으로 돌변한다. <솔라리스>는 이러한 Caos와 Cosmos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우주에 관해, 그리고 인생에 관해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5.

     줌인 쇼트와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쇼트가 유난히 반복된다. 이 두 쇼트들은 영화를 우주에 대응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줌인 쇼트는 관객을 영화(우주) 안으로 끌어들인다. 호수에 떠 있는 수초로,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 사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인물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는 줌인을 통해 관객은 스크린이라는 막을 뚫고 들어가서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영화를 그 영화 속 우주와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쇼트는 그러한 관객이 영화(우주)와 마주보도록 만든다. 이 쇼트들은 일종의 시점 쇼트와 같은 역할을 하며 크리스 켈빈이 우주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관객이 영화를 바라보도록 만든다. 결국, 영화는 하나의 우주가 된다.

     그렇게 크리스 켈빈이 우주를 마주하며 경험했던 변화는 관객이 영화를 마주하며 경험하는 변화로 확장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자신의 인식 체계를 성찰하고, 내면의 환영을 마주하며, 그 도덕성을 발견한다.


6.

     이 영화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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