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예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하인간 Jun 05. 2024

레인은 누구인가, 또 '나'는 누구인가.

[시리얼 익스페리먼츠 레인] 비평

그로테스크한 작화와 난해한 전개로 21세기 사회상을 정확하게 예측하며 오랜 시간 동안 컬트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이 작품은 한 여학생의 투신 자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후 주인공 이와쿠라 레인을 포함한 몇 명의 학생은 자살한 요모다 치사로부터 이메일을 받는다. 수수께끼의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훌륭한 맥거핀의 활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는 단지 맥거핀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맥거핀은 일종의 속임수로서 내러티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지만 관객과 시청자의 흥미를 끌며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지칭한다. 그러나 치사의 자살과 그가 보낸 이메일은 작품의 기본 전제 혹은 배경으로 남아 작품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를 맥거핀이라 말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 이후를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세상의 종말 그 자체인 아포칼립스를 맥거핀이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영화 <우주전쟁>에서 외계인의 침공 또한 맥거핀이라 말할 수 있는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대지진 또한 맥거핀이라 말할 수 있는가?)


레인은 자살한 치사로부터 Wired로 오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Wired는 현실의 인터넷과 유사한 공간이다. 작품 속 모든 등장 인물은 Wired에 자신의 모습을 Metaphorize한다. 의미 그대로 이용자를 은유할 수 있는 복제된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Wired의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그리고 이용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Wired에 투영하려는 집착이 강해짐에 따라 Wired는 현실의 복제품 이상의 것으로 탈바꿈하여 그 자체로서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이 되고 기존의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경지에 이른다. 즉 Wired는 파생실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리적 구속에서 벗어나 정신적 형태로 네트워크에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Wired라는 파생실재는 정신이 육체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실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Wired로 완전히 옮겨가는 일, 육체를 버리고 정신의 자유를 얻는 일, 즉 자살이야말로 합리적인 선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치사의 자살과 이메일은 그렇게 작품의 기본 배경이자 이야기의 시발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지 허구의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작품 밖 현실에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이와 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현대인은 SNS를 통해 인터넷 공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자신이 입은 옷, 자신이 먹은 음식, 자신이 하는 생각, 자신이 영위한 일상을 공유하며 스스로를 Metaphorize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전하고 인터넷에 대한 집착과 중독이 강해질수록 주체는 이용자인 자신에서 이용 대상인 인터넷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제 실재를 복제한 가상의 무언가였던 인터넷은 또 다른 하나의 실재인 파생실재가 되어 기존의 실재를 위협한다. '나'라는 존재가 자신의 일부를 복제하여 인터넷에 게시한 '이미지'는 점차 주체로 거듭나며 '나'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나'와는 무관해진 '이미지'가 현실의 '나'를 제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물리적 속박에서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에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투영하지만 그럴수록 그러한 이상과 가까워질 수 없는 현실 속 이질적인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게 될 뿐이다. Metaphorize는 어느새 시뮬라시옹이 되고 주체는 시뮬라크르의 재물이 되는 굴레다.


레인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레인은 치사에게 Wired로 넘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이후로 Wired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NAVI를 직접 개조하면서 방 안을 기계 장치와 전선으로 가득 채울만큼 몰두한다. Wired를 Real World(현실)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충고에도 그 둘 사이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며 자신 또한 스스로를 Metaphorize해서 Wired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토록 Wired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볼 차례다. 육체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정신이 육체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Real World를 거부하고 물리적 속박에서 벗어나서 Wired 속에 자유롭게 머물 수 있다면 굳이 육체를 고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때 Wired가 작품 내에서 피안의 세계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Wired는 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기독교의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불행한 현실보다 행복한 이상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데 가장 최상의 사유라는 것은 청각이나 시각 또는 고통이나 쾌락이 영혼을 괴롭히지 않을 때 아니겠나? 즉 영혼이 육체와 관계하지 않을 때 영혼이 육체적 감각이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갈망할 때라고 하겠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자는 육체를 경멸하고, 육체에서 벗어나 영혼을 홀로 독립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 플라톤, [파이돈], 스타북스, 2020년, 강윤철 옮김 -


위는 거부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부당한 사형 집행을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들이켜기 직전에 그의 선택에 의문을 품고 있던 시미아스에게 했던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 보아도 육체를 버리고 정신을 Wired로 이전해서는 안 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이데아나 천국은 실존이 규명되지도 않았으며 실존한다고 해도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을 수 없는 곳이지만 Wired는 경험을 통해 직접 실존을 확인할 수 있으며 치사의 사건으로 누구나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증명된 곳이다. Knights라는 해커 집단이 Wired 속 신을 섬기며 일종의 종교 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점과 일부 이용자가 Wired를 현실보다 높은 차원의 우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천국이 누구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입장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면 영혼과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불행의 근원이 되는 물리적 속박을 끊어 버리는 일이 어째서 불합리한 선택이 될 수 있는가. 어째서 자살이 정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작품은 육체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으로 이를 반박한다. 결말부에서 레인이 몸에 전선을 연결하고 기계 장치 따위로 전락하는 일을 자처했을 때 미즈키 아리스는 신체 접촉만으로 레인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본인도 잘 모르겠다는 아리스의 대사처럼 작품 또한 뚜렷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육체의 살아 있음은 그 자체만으로 핵심적인 반박 근거로 작용한다. 차갑게 굳어 있는 레인의 뺨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리스의 두근거림은 합리주의적 논증으로도 무화시킬 수 없다. 이것이 육체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적 인식은 이제 육체와 정신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라는 일원론적 인식으로 전환된다. 정신의 자유를 위해 육체를 버리겠다는 선택은 타당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이원론적 인식을 전제로하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육체의 불완전함과 그것이 지니고 있는 한계가 정신의 자유로움을 억압하는 족쇄와 같다는 결론은 논리적 비약이고 억측이다. 정신의 자유롭지 못함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신 또한 불완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말할 것인가? 그렇게 말해도 되는가? "아무튼 그러한 판단은 무언가 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라고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시대의 최고의 현인들이라는 사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두 다리로 제대로 서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발육부진이거나 절뚝거리거나 데카당이 아니었을까? 지혜란 썩은 짐승의 시체가 풍기는 희미한 냄새에도 도취하는 까마귀처럼 지상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아카넷, 2015, 박찬국 옮김 -


위는 니체가 어느 시대든 최고의 현인이라 불리는 이들이라면 전부 삶은 무가치하다는 공통된 염세주의적 주장을 견지했던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썼던 글이다. 공교롭게도 위 글의 제목은 '소크라테스 문제'다. 사형 집행을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들이켜기 전에 설파했던 철학적 사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아들였던 이유는 그의 주장처럼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철학자의 이상에 가까워지기 위함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본인조차 삶에 싫증이 나고 지쳤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데카당을 극복하는 것이 곧 데카당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육체를 벗어던지고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결심은 더 이상 육체를 감내하지 못하고 굴복해 버린 정신의 도피 욕구를 마치 정신의 차원을 높이기 위해 육체를 극복하기 위한 선택인 것처럼 포장하려는 심리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잃은 이들만이 이데아, 천국, 그리고 Wired와 같은 피안의 세계를 꿈꾼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대중화된 플라톤주의로 생각했던 니체에게 Wired는 다시 한 번 대중화된 기독교일 뿐이다. 여느 피안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Wired는 Real World 속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육체의 가치를 잊어 버리도록 만들고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며 종국에는 자살을 부추긴다. 결말에서는 Wired 속 신 또한 현실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약한 도피자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만약 모든 등장 인물이 Wired로 정신을 이전했다면 그들은 분명 이러한 신에게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니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했을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Wired 속 또 다른 피안의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다. 도피의 끝에 낙원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레인의 경우는 특별하다. 그는 신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Wired에 스스로를 Metaphorize한 존재가 아니라 Wired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존재하던 프로그램이 현실에 만들어 낸 홀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레인은 아리스의 바람대로 육체로 남아 있기를 선택했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레인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작품의 타임라인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레인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자신과 동일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존재로 인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여러 주변인의 추궁을 받는다. 처음 가 본 Cyberia에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네이트워크에 이변이 생겼을 때는 그의 얼굴이 NAVI에 송출되었으며, 결정적으로는 현실에서조차 하늘에 그의 형상이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언뜻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Wired에 레인의 모습을 Metaphorize해서 그를 사칭하고 있는 것이라 의심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서로 다른 두 레인이 모두 레인 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강해지면서 정체성의 혼란은 가중된다. 이렇듯 레인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 중 첫 번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마치 자아가 분열된 것처럼 서로 상반된 두 자아가 존재하고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혼란이다.


다치바나 연구소의 주요 인물을 만났을 때 레인은 Wired 속 레인과 동일 인물인지 추궁을 받다가 Wired 속 레인의 모습처럼 날카롭고 까칠한 성격을 드러낸다. 그로 인해 두 레인이 모두 레인 본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인가?"라는 질문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두 번째 정체성의 혼란이다. 두 가지의 레인 중에서 무엇이 '진짜' 레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둘 모두 '진짜' 레인이다. 그렇다면 '이것'의 요소와 '저것'의 요소 중에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하나'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과 '저것'의 요소는 모두 빠짐없이 '하나'인가? 이야기가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레인은 Wired 속 하나의 소프트웨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레인이 Wired에서 이용자의 모든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Wired에 Metaphorize된 형상은 어느 순간부터 전부 레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라는 말처럼 Wried 속 존재는 모두 레인 자신인가? 레인의 개별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나'를 설명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겉모습이나 외적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나'는 피부가 하얗다.'라는 특징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타인과 '나'를 구별해 줄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하얀 피부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하얀 피부를 가졌다면 누구는 '나'가 될 수 있는가? 태닝을 해서 피부를 태운다면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게 되는가? 두 번째는 성격이나 내적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나'는 착하다.'라는 특징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타인과 '나'를 구별해 줄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착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착하기만 하면 누구나 '나'가 될 수 있는가? 어느 날 화가 나서 못된 행동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게 되는가? 혹은 그 행동이 '나'가 한 행동이 아니게 되는가? 누군가가 자신을 "'나'는 피부가 하얗고 성격이 착하다."라고 소개한다면 그 순간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피부가 하얗고 성격이 착하다.'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모두가 '나'가 되며 '나'는 언제든지 '나'가 아닐 수 있게 된다.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순수한 형태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현실의 모든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육체는 타인과 '나'를 구별해 줄 수 있는 물리적으로 개별화된 기준이다. 설령 그 육체의 특징이 변화하거나 타인과 동일하더라도 서로 단절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타인과 구별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자아 정체성은 육체 이후에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구체화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인은 Wired에 스스로를 Metaphorize하는 Real World의 존재가 아닌 Wired의 시초부터 존재하던 소프트웨어로서 Real World에 홀로그램의 형태로 원본 없는 이미지를 생산해 냈을 뿐이다. 육체라는 원본이 없는 레인의 시뮬라시옹은 정체성의 혼란을 Real World의 인간보다 치명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레인이 육체를 포기하려 했던 이유다. 하지만 레인은 아리스의 설득으로 육체를 포기하는 것 대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신을 삭제한다. 이제 레인의 정체성의 혼란은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는 것이다. 첫 번째와 표현은 동일하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 레인은 이제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첫 번째 질문은 '나'라고 여기지 않았던 또 다른 '나'를 '나'로 인정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나'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요소 중에서 인식 밖에 있던 것들에 다시 주목하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인가?"라는 두 번째 질문은 타인과 구별될 수 있는 개별자로서의 '나'를 찾는 과정이다. 첫 번째 질문으로 인해 양적 포화 상태에 놓인 '나'의 요소 중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의 것인지를 고민하며 순수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세 번째 질문은 원본의 육체를 지니지 못하는 시뮬라크르로서의 '나'가 타인의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 상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세 번째 질문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을 변증법적으로 포괄한다. 다양한 요소를 차별 없이 함께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질문과 닮았으며 동시에 그러한 요소 중에서 무엇이 자신만의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밝혀 내야 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질문과 닮았지만 육체와 기억이라는 원초적인 요소에 의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어느 것과도 같지 않다.


레인이 겪은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소프트웨어에 불과할 뿐인 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Real World 속, 그리고 작품 밖 현실 속의 수많은 인간 존재가 마주할 수 있는 혼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작품이 정확하게 예측해 버린 21세기 인터넷 사회의 미래가 어둡게만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품 내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수많은 대중이 스스로를 인터넷 공간에 투영하며 자신을 시뮬라시옹하고 육체의 가치를 잊어 버린 채 정신의 자유만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SNS나 온라인 게임 등을 통해 인터넷 공간에만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 중독된다. 특히 'VR Chat'이라는 게임은 작품 속 Wired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또한 공공장소에서 Apple Vision Pro를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는 작품에서 Knights에 입단하려고 했던 남성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결말이 레인과 다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지금의 현대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의 레인과 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마주하고 있다.


[시리얼 익스페리먼츠 레인]은 단 13부작의 분량만으로 이렇게 수많은 철학적 사유를 제공하며 현대 사회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물론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연출적 형식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로테스크하고 몽환적인 연출은 난해한 전개를 만나 기이하고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레인의 등하굣길은 마치 카메라의 과노출된 이미지처럼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고 그림자에는 핏자국을 연상시키는 붉은 얼룩이 자리하고 있다. 조용한 거리에도 전깃줄을 타고 흐르는 험노이즈는 한 순간도 끊이지 않으며 심리를 압박해 온다. Wired라는 가상의 공간을 다양한 형태로 시각화한 연출이 창의적이며 그러한 Wired가 현실 공간인 Real World에 침투해 오는 모습 또한 효과적인 방식으로 섬뜩하게 그려 냈다. 종종 인물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한 프레임으로 길게 보여 줄 때면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톤 앤 매너는 이야기의 주제와 맞물리며 높은 몰입도를 유지시킨다. 작품의 주제와 현재 사회를 함께 되돌아보며 한 번 즈음은 반드시 감상해 보아야 할 작품임이 분명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베르트 모리조 작품에서 나타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조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