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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인간 Jun 09. 2024

<체리 향기>가 이룬 영화 예술의 숭고함

이야기의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도 영화는 숭고해질 수 있는가. 관객이 호기심을 품고 그것을 스스로 해소할 수 있도록 이야기와 인물에 관한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영화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소양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영화를 숭고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그러한 방식의 연출은 영화의 숭고함을 보장할 수 있는가. 사실 알맞은 정보를 친절하게 전달한다면 영화를 감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것들을 이해하고 유희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형태의 유희는 숭고함과는 무관한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이해하는 과정은 하나의 국가가 식민지의 자원을 착취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선택해서 그 외피를 걷어 내고 원하는 바를 얻어 내는 일에 존중과 배려가 들어설 틈은 좁다. 감동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선택적인 감정이다. 예술을 소비한다는 순수한 의도가 때로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성을 내포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에서 영화의 숭고함은 오히려 정보를 은폐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차를 타고 거리를 배회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 <체리 향기>는 색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등장 인물의 일상을 제시한 다음에 그를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에 개입시키면서 어떻게 행동해 나아갈 것인지를 궁금해 하도록 만드는 보통의 영화와는 달리 이미 무언가를 행동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하면서 그 배경에 관해 호기심을 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관객이 주인공 바디에게 갖는 호기심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거리를 배회하며 행인을 차에 태우려 하고 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래 지나지 않아 궁금증이 해소된다. 한 군인을 차에 태운 바디는 일상적인 대화로 친밀감을 쌓다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본심을 드러낸다. 다음 날에 언덕으로 찾아와서 이름을 부르고 자신이 대답하지 않으면 시신 위에 흙을 덮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 답례로 차에 돈을 넣어 둘 테니 그것을 가져가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자살을 도와 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가 ‘왜’ 그 행동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바디는 왜 자살하려고 하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하지만 <체리 향기>는 이와 관련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관객은 영화를 끝까지 감상하더라도 바디가 자살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성숙함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만약 감독이 영화 속 인물에 관해 다량의 정보를 제공한다면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당 인물을 고유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그저 평가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러한 태도는 자신이 제공 받은 정보가 해당 인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의 전부이며 이를 통해 그 인물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착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또한 <체리 향기>에서 바디가 자살하려는 이유를 설명했다면 관객은 그의 선택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혹은 ‘그것은 자살할 이유가 될 수 없다.’라는 식으로 바디의 삶을 섣부르게 판단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바디의 자살 심리를 설명하지 않는 선택은 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객이 영화의 주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거리를 배회하며 행인을 한 명씩 차에 태우는 바디의 행동은 극장에 앉아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에게 한 명씩 질문을 던지는 일과 같다. 관객은 바디의 차에 탔던 행인처럼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설득의 과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바디의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그가 뚜렷한 원인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 여겨질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를 찾게 될 따름이다. 즉, 바디라는 인물로 인해 제기된 물음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관객은 삶의 의미를 사유하고 ‘나는 왜 사는가.’라는 성찰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바디의 자살 심리는 언뜻 이야기의 핵심적인 정보처럼 보이지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면서 영화의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영화가 바디의 삶을 평가하기 위한 청문회로 변질되는 일을 막고 관객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며 바디의 자살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예상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는 노인이다. 그는 자제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바디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지만 동시에 바디가 삶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디가 자살하려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탓에 노인 또한 구체적인 근거가 아닌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역설한다. 그중 두 가지 이야기에 주목해 볼 만하다. 첫 번째는 체리로 인해 자살하려는 마음을 돌이켰던 과거의 경험이다. 밧줄을 매달기 위해 나무 위에 올랐던 그는 길을 지나가던 아이들의 부탁으로 나무를 흔들어서 체리를 밑으로 떨어트려 주었다. 그러다 자신도 체리를 맛보고는 한가득 주워 들고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먹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손가락을 다친 터키인의 이야기다. 손가락으로 짚는 곳마다 온몸이 아팠던 터키인은 의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의사는 몸이 아니라 손가락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했다는 것이다. 모두 인식의 전환을 일으키는 상징적인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실제 경험이나 사건을 바탕으로 두었지만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태도를 성찰할 수 있는 일화다. 이러한 귀납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순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자살 심리는 무력감을 일으키는 불가항력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곳에 원인을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탓에 이것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체리 향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주제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그저 관객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철학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하나의 본보기로 개인적인 입장을 담았을 뿐이다. 감독의 주장이 될 수는 있어도 작품의 주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가 전달하고자 한 주제였다면 결말부에서 바디의 자살 여부가 증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바디가 ‘무엇’을 행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왜’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호기심이 그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인계되었음에도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막을 내린다. 이는 영화의 결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일반 관객은 <체리 향기>의 실제 결말을 알기 어렵다.

     흙 위에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바디의 모습을 비추고 화면이 암전된다. 1분 정도가 흐르면 캠코더로 촬영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바디를 연기한 호마윤 엘샤드, <체리 향기>를 촬영하고 있는 실제 제작진의 모습이 비춰진다. 이것이 본래 결말이었지만 <체리 향기>가 처음 개봉했을 당시에 관객의 거센 비판을 받고 삭제되었다. 국내에 수입될 때도 결말이 삭제된 편집본이 수입되어서 대부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바디의 모습으로 결말을 맺는 <체리 향기>를 감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삭제된 결말이야말로 윤리라는 이름으로 찍은 성숙한 마침표인 동시에 작가주의의 정수가 담긴 장면이다. 심지어 <체리 향기>는 이 4분 정도의 결말 없이는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체리 향기>의 결말은 이 영화가 그저 영화일 뿐이라고 상기시키며 못을 박기 때문이다. <체리 향기>는 확신을 주지 않는 영화다. 관객이 스스로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영화고, 영화는 그 과정을 안내하며 방향을 제시할 뿐이다. 최종에 가서는 ‘영화의 역할은 여기까지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다.

     영화가 친절할수록 관객은 게을러진다. 감독이 관객의 입맛에 집착할수록 관객은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감각하는 태도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 대중은 스스로 게으른 관객이 되고자 한다. 이야기의 주제를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는 영화, 주제에 대한 해답을 명확하게 표명하지 않는 영화, 그러한 함의를 근사한 볼거리로 포장하지 않는 영화를 불호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체리 향기>와 같은 영화도 존재한다. 때로는 관객을 나태한 관조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불친절한 작품이 되기로 마으먹은 작품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체리 향기>는 관객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사유하도록 만드는 영화다. 바디의 자살 여부를 보여 주면서 결말을 맺었다면 <체리 향기>는 2시간찌라 설교로 관객의 삶에 개입하려는 프로파간다가 되었을 것이다. <체리 향기>의 결말은 바디의 자살 여부를 숨기고 ‘이것은 영화일 뿐이다.’라고 상기시키며 영화를 마무리했기 때문에 관객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사유하며 삶을 성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학적/윤리적/수사적 측면에서 작품을 숭고하게 만든 결말인 것이다.

     현실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대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좌절되는 공간이 현실이고 성숙한 삶을 위해 새로운 시각을 탐구하는 행위가 예술이라면 예술은 그러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영화사 속 최고의 윤리학자인 이유다. 그는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창작된 이야기 속 허구의 인물조차 실존 인물인 것처럼 존중하며 그들을 프레임 안에 가두는 과오에서 거리를 두었다. 닫힌 결말은 등장 인물의 삶이 가진 가능성과 관객에게 필요한 주체적인 사유의 문까지 닫아 버리기 때문에 이야기의 핵심적인 정보를 숨기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며 메타적 기능을 활용했던 것이다. <클로즈 업>에서는 등장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전개해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는 영화가 막을 내려도 등장 인물이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이 프레임 밖을 빠져나갈 때까지 카메라가 고정된 위치에 서서 기다리게 만들었다. 이를 이어 <체리 향기>에서는 바디의 자살 심리를 숨기고 촬영 현장의 모습으로 결말을 맺었던 것이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무언가를 감추려고 하지 않고 등장 인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영화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포르노그래피에 가깝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이다. 사실 영화는 형식상 포르노그래피와 구분하기 어렵다. 둘 모두 시청자의 특정한 욕구를 해소시키거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제작되며 그 과정에서 감독은 허구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한다. 영화가 사랑을 이야기할 수는 있는데 섹스를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윤리에 있다. 포르노그래피는 제작자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등장 인물의 인격을 침해한다. 배우가 연기하는 그 인물이 성욕을 해소하는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영화가 포르노그래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등장 인물을 존중하고 관객 또한 그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등장 인물이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관객이 그들의 삶을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체리 향기>의 숭고함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이러한 철학에 입각하여 윤리적 형식을 관철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체리 향기>에는 영화 그 이상의 숭고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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