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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인간 Apr 22. 2022

미디어 윤리의 행방은 어느 곳에 있는가

<비디오드롬>을 통해 바라보는 뉴미디어의 윤리적 전망

'바보상자'는 TV의 부정적인 영향을 꼬집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실제로 TV는 그것을 소비하는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TV 앞에만 앉으면 생산적인 활동은 뒷전이고 멍하니 화면만 응시하게 되는 탓이다. 심지어는 TV 시청 시간 차이에 따른 치매 발병 확률 증가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한 연구도 존재한다. TV에 중독되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것은 명백하게 인간을 바보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문해 보아야 하는 점이 있다. TV가 자신을 창조한 인간까지도 바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오히려 인간보다 똑똑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바보상자'라는 낱말은 잘못되었다. TV는 오히려 '천재상자'로 불리는 것이 맞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TV는 인간을 바보로 만들어 버린 뒤 그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지배하니, '지배상자'라는 이름이 제격이다. 이는 비단 TV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TV를 포함한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과연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대상인가. 인간 세계의 기술 발전을 사유할 때면 늘 하이데거가 단서를 제공한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발전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자원 강탈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도록 만들었다고 보았다. 자연 그 본래의 충만함과 생동감은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석탄이나 뽑아내고 옥수수나 키워내도록 닦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심지어 인간 스스로에게까지로 향했다. 인간이 인간을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할 수 있는 자원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서 인간은 고유한 정체성을 잃고 시계태엽 따위로 전락한다. 인간을 위해 쟁취하고자 했던 기술 발전이 도리어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하이데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나면, 사유는 그곳에서 다시 확장된다. 인간의 과학적 성장과 윤리적 성장 사이의 괴리에 관해서 말이다.

     인류는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과학적 성장을 이룩해냈다. 바다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어서 한쪽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추락하고 말 것이라 믿었던 겁쟁이 인류가 지구 반대편을 오가는 일은 물론이고 우주로까지 영역을 확장시킨 데에는 천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윤리적 성장은 어떠한가. 기원전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무용지물로 여겨지는 혼탁한 세상이다. 상황이 이러한 탓에, 크로넨버그 감독이 <비디오드롬>을 통해 약 40년 전에 경고했던 바가 아직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그러나 크로넨버그 감독의 경고는 한 세대를 뛰어넘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역설적이게도 어느 면에서는 지금에 와서야 더욱 절실해졌다. 21세기는 기술 발전 속도에 발맞추느라 윤리적 성장이 외면받는 시대다. 인류는 힘을 얻었지만 책임을 잃었다. 성찰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맥스 렌(제임스 우즈, 이하 '맥스')은 포르노 사업을 하는 경영자다. 또한 엔지니어를 고용해 방송 전파를 해킹하는 방법으로 지하 시장에서 제작되고 있는 영상물의 발굴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첫 번째 '비디오드롬'을 찾아낸다. 보다 자극적인 영상을 원하는 그에게 비디오드롬은 '차세대 영화'나 다름없는 존재다. 관련 조사를 부탁하기 위해 마샤(린 고먼)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현대적(Contemporary)'라는 단어를 사용한 모습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듯이, 그는 '자극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니키 브랜드(데보라 해리, 이하 '니키')는 "우린 지나치게 자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며 그런 맥스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조차도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이때, 붉은 색 드레스는 맥스의 언급처럼 '매우 자극적'이며, 실제로도 붉은 색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성욕과 대응된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가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태도를 스스로 자각하고 있음에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니키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직후에 제기된 반론에서조차 아무런 해명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붉은 색 드레스에 관한 프로이트적 관점을 대수롭지 않게 수긍하며, 자신 또한 '지나친 자극으로 흥분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까지 한다. 이는 자극적인 것에 대한 우려가 형식적인 측면으로만 제기될 뿐,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이 TV 토론 시퀀스에서 묘사되는 니키라는 인물은 '자극적인 것'이 '현대적인 것'이 되어 버린 시대 속에서는 비판이 아무런 영향력도 갖지 못하며, 시대적 흐름에 어떠한 제동도 걸지 못할 것임을 예언하기 위한 장치다. 성찰하지 않는 시대는 비극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라며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디오드롬>은 인간이 미디어 매체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과 그 폐해를 짜임새 있는 각본과 연출로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맥스라는 인물과 비디오드롬이라는 영상물이 존재한다. 특히 이 둘의 연결 고리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본질적인 주제에 가까이 가닿을 수 있도록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에, 영화가 이야기하는 정확한 논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를 중점에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TV 스크린이 인간의 망막과 같다는 말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에서부터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TV 스크린과 망막에 관한 비유는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개념이다. 인간의 조직과 기계의 부속을 연결 짓고 있는 이러한 대사는 심지어는 충분한 여유를 두고 설명되지도 않기 때문에 난해하게 느껴질 만하다. 하지만 인간의 시각 체계의 작동 원리만 파악하고 있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물체에서 반사된 빛은 인간의 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각막과 수정체에 의해 굴절되어 상이 뒤집힌 상태로 망막에 맺힌다. 그러면 망막은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 전달한다. 이것이 인간이 무언가를 보는 행위가 가능해지는 원리다. 때문에 인간은 망막에 맺혀 있는 상만을 볼 수 있으며, 망막에 상이 맺히지 않은 그 이외의 것은 직관할 수 없다. 결국, TV 스크린이 망막과 같다는 말은 TV에서 보여주는 것만을 보며, 그 이외의 바깥 세상은 보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경험론적 입장에서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믿을 수 없는 인간에게 TV가 망막이 되어 버린다면, 오직 TV만이 지식의 원천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TV만이 진실이고, 반대로 현실은 말뿐인 공허한 거짓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TV가 곧 현실이고 현실은 TV보다 못하다고 말한 브라이언 오블리비언(잭 클레리, 이하 '브라이언')의 말은 이런 의미였다. 이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망막화된 TV 스크린은 현실을 거짓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뿐만 아니라, 거짓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정신을 좀먹는다. TV는 현실과 다르다. TV가 망막이 되어 버린다면, 인간은 더 이상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마치 환각을 경험하게 된 맥스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맥스를 속이기 위해 영상을 제작했던 베리 콘벡스(레슬리 카슨, 이하 '콘벡스')와 그의 동료 할란(피터 드보르스키)이 안경점에서 일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점 또한 이와 같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경이라는 것은 눈동자로 들어온 상이 망막보다 앞이나 뒤에 맺혀서 흐려진 시야를 렌즈를 통해 조정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건의 근원지가 사실상 안경점에 위치했던 것은, 안경처럼 시야를 뚜렷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던 TV의 영향 아래에는 오히려 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숨겨진 힘이 존재함을 나타낸다.

     영화가 환각을 묘사하는 방식은 비디오 테이프와 TV가 숨 쉬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으로 본격화된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맥스의 환각이 비디오 테이프와 TV가 '생명력'을 얻는 형태로 구체화되는 것은 양자 간의 주체성 전이가 일어나고 있음을 시각화하기 위함이다. 이는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콘벡스가 맥스의 몸에 비디오 테이프를 삽입하는 것으로 완성에 이른다. 비디오 테이프를 TV에 직접 삽입하고 그것들을 조작하던 주체로서의 맥스는 자신의 몸에 비디오 테이프가 삽입되는 것으로 객체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에 따라 '보는 것'에서 그쳤던 환각도 이제 직접 '행하는 것'으로 변모한다. 맥스가 TV를 조작하는 것에서 TV가 맥스를 조작하는 것으로 권력 관계가 전복되어 버린 이상,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TV 그 자체다. 그는 결국 조작되는 바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고, 종말에는 자살까지 실행하게 된다.

     이것이 <비디오드롬>이 미디어에 잠식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뒤에 숨겨진 실질적인 권력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맥스를 지배한 비디오드롬을 만들어낸 이들의 정체 말이다. 영화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그들은 브라이언과 콘벡스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맥스를 조작했는가. 이 질문 역시 영화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브라이언은 맥스와 같은 이들이 제작하는 영상과 그것들을 소비하는 이들이 세상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믿으며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반대로 비앙카 오블리비언(손자 스미츠, 이하 '비앙카')은 대를 이어 온 사업이 피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 비디오드롬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종합해 보면, 맥스는 사실 제삼자의 정치적 싸움에 선동되어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듯 <비디오드롬>은 미디어의 폐해와 그 폐해를 악용하는 권력자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글을 시작하며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것들은 비단 TV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TV를 시청하는 것 대신에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간이 많아진 현대에는 오히려 차세대 미디어의 위험이 심각해졌다. 안경을 쓴 것처럼 뚜렷한 시각으로 개안을 이끌 것이라 믿었던 뉴스들도 사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감정을 자극하기만 하는 렉카인 경우가 허다하고, 주체성을 잃어 버린 맥스처럼 그것들은 보는 이들의 주체적인 사고를 가로막고 그들을 선동한다. 더불어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영상을 제작하고 공유하는 것이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하이데거를 언급하며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것을 활용하고 소비하는 일에만 관심이 쏠리는 탓에 윤리적인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N번방과 알페스 등 자극적인 것을 넘어서 명백한 범죄 행위에 해당하는 일들이 미디어를 통해 음지에서 유포되고 있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술 발전의 두근거림이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비관적 전망을 묵살시키는 정도가 가장 강한 것은 단연 AI 기술이다. AI 기술은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손에 쥐었던 그 어떤 기술보다도 활용도와 잠재력이 높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만큼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도 거대한 데 비해서, 이에 관해서는 충분한 토론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그러한 문제가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음에도, 오직 그 활용성에 감동하고만 있을 따름이다. 대표적으로는 인간의 생체 정보를 학습한 뒤에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해내는 기술이 있다. 이는 단지 딥페이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망한 가수의 목소리를 분석한 뒤, 그들을 다시 무대 위에서 노래하게 만들거나, 사망한 가족의 목소리와 외모를 분석해 VR로 그들을 다시 살려내는 등의 일이 모두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기술 발전의 결과물은 과연 순선한 감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해 생각해 볼 때는 먼저 그들의 동의를 구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즉, 사망한 가수가 생전에 자신의 목소리를 분석해서 새로운 곡을 부르게 만들어도 된다고 허용했는지, 사망한 가족이 생전에 자신의 목소리와 외모를 분석해서 VR로 구현해내도 된다고 허용했는지가 중요한 판단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AI 기술은 이제 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활용되기 시작되었다. 사망한 이들이 이에 관해 알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들의 동의가 중요한 이유에 관해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답해 보아야 한다. 인간에게 인권과 자유가 중요하게 여기지는 이유에 관해서, 그리고 인격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AI 기술의 잠재력에 감탄하느라 이러한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철학조차 잊어서는 안 된다. 윤리적 성찰도 없이 활용되는 기술은 비디오드롬의 경우처럼 비극을 저지할 수 없게 된다.

     인격은 그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특성의 총합이다. 인격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해 주는 단 하나의 근거고, 자신만이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이자 자유라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야만 할 때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기술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대상의 인격을 활용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 외모, 성격 등을 분석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유는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인격을 도용당한 것이고, 이용당한 것이며, 박탈당한 것이다. 차라리 딥페이크는 그 피해자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처가 가능하다. 하지만 사망한 사람을 되살려내는 일은 그 피해자가 반발조차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산 사람들의 폭력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비교해 보자. 맥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조작당하며 주체성을 빼앗기고 행동하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결과에는 그의 책임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또한 딥페이크는 그 사람의 의지와 상관 없이 주체성을 빼앗고 인격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남용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이야기했던 사망자를 살려내는 AI 기술은 그 사람의 의지와 상관 없이 행해지며 주체성을 빼앗고 인격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이 셋의 차이점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자신의 욕구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의 인격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은 일이 아닌가. 현대인은 떠나간 이를 놓아주는 방법을 잊었다. 기술의 발전은 그들에게 떠나간 이를 붙잡을 수 있도록 올가미를 선물했다. 이는 절대적으로 미성숙한 일이다. AI 기술로는 절대 사망한 이를 되살려낼 수 없으며, 오로지 그들의 인격만 침해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비디오드롬>은 자극적인 것에 빠져드는 인간의 타락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아직까지 AI와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그 둘 사이의 접목은 감동이라는 감정을 명분으로 내세워 활용되고 있지만, 언제나 보다 더 자극적인 것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구에 의해 어느 길로 빠져들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작품 속에서 맥스는 비디오드롬을 틀어 놓고 니키와 성관계를 갖는다. 영상 속 폭행을 당하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그것을 본인들의 욕구 해소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AI 기술로 사망한 가수를 살려낸 뒤, 그 모습을 보며 눈물짓는 관객들의 모습이 맥스와 니키를 보는 듯하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대상의 인격은 안중에도 없고 단지 그들을 '그리움'이라는 욕구의 해소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브라이언은 영상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영구적인 형태로 보존했다. 사망한 이들을 되살려내는 일 또한 그러한 브라이언의 행위와 다름없다.

     "새로운 육체에 영원한 삶을!"이라 외치며 자살한 맥스의 우매함이 현대 기술 발전의 방향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절제 없는 자극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성찰 없는 기술은 인격을 훼손하며,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것은 영상일 뿐이지  안에 담긴 이들의 흔적이 아니다. 비디오드롬에 의해 조종당한 맥스처럼, 현대 미디어 기술도   없는 권력자에 의해 대중을 휘두르는 무기가   있다.  탓에 유일한 안전장치는 오직 각자의 윤리 의식과 판단 능력이  수밖에 없다. 모든 운전자가 필수적으로 안전띠를 착용해야 하는 것처럼, 미디어를 소비하는 일에 있어서도 스스로 조심하고 절제하는 것만이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인격을 단순한 욕구 해소 수단으로 이용하는 매체도 뚜렷한 제도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 물론  욕구가 그리움이든 성욕이든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시켰다면 모두 동등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래야만 사각지대랄 피할  있다.

     부디 낡은 육체에 유한한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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