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외국의 어딘가로 유학을 갔다.
말만 유학이지 그냥 어쩌다 가게 되었다.
그 먼 이국땅에서, 사업을 하던 친척집에 얹혀살았다.
잠시 그랬다면 모르겠지만, 거의 3년을 가까이 그 가족들 틈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지냈다.
밥 먹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샤워하며 샴푸를 쓰는 것조차도 뭐라 하는 동생들이 있었다.
다들 거실에 나와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과일을 먹는데 나는 종종 그냥 방 안에 혼자 있었다.
평소에 일면식도 거의 없던 그 가족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가끔 분위기가 허락할 때, 아니면 동생들이 나를 껴줄 때, 아니면 내가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을 때
그날의 공기나 분위기 따라 나는 어울리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였다.
나를 살갑게 챙겨주는 사람 당연히 없었고, 오히려 "쟤는 왜 저러냐"는 식으로 타박을 받거나 뒷담화 대상이 되었다.
그 가족이 살던 집은 2층짜리 주택이었고 나는 주방 옆에 있던 작은 피아노방에서 지냈다.
그 방 안에서 방문에 귀를 대고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엿들은 적도 많았다.
언젠가는, 내가 입학한 학교의 선생님이, 다른 한국 학생에게 '한국 여자애들은 저렇게 등치가 크고 뚱뚱하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말이 나에게 전해져서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 선생님은 요즘 말로 훈남이었고, 내가 마음속으로 몰래 좋아하던 사람이었거든.
다이어트를 했고 그게 이모의 눈에 상당히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한국에 있는 엄마가 나를 오랜만에 보았을 때, 애가 말라있으면 본인을 어떻게 보겠냐는 논리였다.
그 말을 나에게는 하지 않았지만 식탁 머리에서 이모부와 나누는 대화가 내 방으로 흘러들어왔다.
어떨 때는 그 날 집에 놀러왔던 한인 아주머니들의 흉을 보기도 했다. 분명히 너무 즐겁게 맞이하셨던 거 같은데 그들이 모두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 갑자기 이모부 앞에서는 나쁜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많이 어렸던 나는 그런 모든 말들이 충격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못했다.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 이후로 나는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 되어갔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나는 여기 있어도 되는 건지, 누가 나를 험담하진 않는지
먼저 이런 것들을 살피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외국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한창 예민한 중학생 시기였고, 그 이후로 난 정말 많이 변한 것 같다.
그 3년 동안 가족을 떠나 친구 없이, 눈치 보며, 땀을 삐질거리며 살았던 하루하루가 지금도 나를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모나 친척 동생들이 나오는 꿈을 자주 꾸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꾼다.
그때 방 안에 홀로 있던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고, 눈치를 많이 보고, 나에 대한 긍정적인 승인이 있어야 안심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마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부분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또 누구나 이런 부분이 조금씩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도가 좀 컸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나에겐 생생한 그 3년 간의 나날들.
나는 그때 나와 지냈던, 인사했던, 얼굴을 봤던 사람들 대부분을 지금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들에게 분노 같은 것이 있었다.
머리로는 그들이 이해되었고, 친척이랍시고 자기네 집에 들어와서 먹고 자고 싸는 사람을 곱게 볼 수 없겠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고, 여하튼 이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건 이성의 영역이었고, 내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상처 받은 사람이었다.
상처인지 뭔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겐 큰 상처가 남아 있었다.
매일 그 상처를 꺼내보고 거울에 비춰보고 약을 발라보고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떠벌리기도 하며 살았다.
무슨 보물처럼 그 상처를 간직하고 살았다.
훈장처럼 지니고 살았다.
그리고 25년이나 지나 나는 어쩌다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하고 내 집과 내 가족이 생기게 되었다.
서로 맞출 것이 많았고 다툴 것도 많았다.
하지만 늘 상대방의 심경을 살피고 조심해야 했던 나는 사라지고
마음껏 울고, 웃고, 먹고 씻을 수 있는 온전한 울타리가 생겼다.
나는 안전했다.
내 마음은 안전하다.
이곳은 안전한 나의 공간, 우리의 공간이다.
그렇게 온전하게 안전한 공간에서 지내던 어느 날
어떤 꿈을 꾸었는데,
내가 이모와 이모부에게 어떤 파티를 해주고 있었다.
사람들과 몰래 준비를 해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줬다.
꿈속에서도 그 파티를 준비하는 게 그닥 즐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니,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모와 이모부는 파티로 즐거워했고,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꿈에서 깬 오늘 아침
나는 생각했다.
이제 보내드려요.
나 이제 안전한 곳에서 건강해졌고
더 이상 그때의 당신들을 꺼내보고 곱씹지 않게 되었어요.
어리숙한 나를 데리고 산 당신들도 답답하고 힘들었겠죠.
가세요 이제.
난 괜찮아졌어요. 아주 많이.
25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