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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라 메이 Mar 18. 2021

그 외국인이 본명과 한국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한국 생활 24년 차 외국인의 삶

내 본명은 Ryla Mae(라일라 메이), 한국 이름은 '차미화'다. 나는 오랫동안 두 이름을 달고 살았다. 사람들 앞에서 두 이름을 언급하면 '어머? 한국 이름도 있었어요?'라는 말을 한다. 차미화는 중학교까지 썼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어른들의 선택 때문에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라일라 메이가 총 5자라서 이름표에 넣을 자리가 없거나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를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라일라 메이가 아닌 차미화를 쓴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주변 사람들이 한국 이름 관련해서 이런 질문을 자주 했다.


'한국 이름을 가지고 살았을 때 어땠나요?'


별로였다. 한국 이름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름다울 '미', 꽃' 화'.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그런데도 거부감이 들었다. 다른 이름으로 사는 것이 내 정서에 좋지 않다. 두 개의 이름으로 사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했다.


난 학교에 가면 차미화가 된다. 그리고 학교 밖으로 가면 다시 라일라가 된다. 낮에는 차미화, 밤과 주말에는 라일라로 사니까 이중생활을 하는 기분이었다. 차미화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나한테 '라일라!'라고 부르면 움찔해진다. 마찬가지로 라일라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차미화!'라고 부르면 이상하게 숨고 싶은 심리가 나왔다. 차미화가 되었을 때 라일라의 존재가 들켰고, 라일라가 되었을 때 차미화의 존재가 들켜서 움찔했다. 움찔했던 반응을 기억하면 내가 차미화와 라일라를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두 이름에서 각자의 성격이 있구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두 이름을 두 사람으로 여겼던가.'


차미화는 한국인 같은 외국인이다. 그녀는 한국어를 하는 나 자신이다.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변에 한국 친구들이 많다. 친구들이 그녀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면 '맞다. 너 외국인이었지?'라는 말을 한다. 차미화와 반대로 라일라는 영어를 하는 나 자신이다. 그녀는 외국인 친구들이 많고 한국어를 잘 안 한다. 차미화가 한국어를 하고 라일라가 영어를 하니까 내 안에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다. 


차미화가 길을 가다가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고 보자. 짧은 대화 끝나고 헤어질 때 그 친구에게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한다. 정말 약속 잡고 밥 먹자는 뜻이 아니다. 차미화가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에 친구한테 '밥 먹었어?'라는 말을 하면 친구에게 밥을 사주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라일라는 그런 말을 안 한다. 그녀가 길을 가다가 연락 없던 친구를 만나서 대화를 했다고 보자. 차미화가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했다면 라일라는 영어로 '언젠간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긴다. 당연히 약속 잡고 다시 만나자는 뜻이 아니다. 영어 하는 사람들의 인사법 중 '언젠간 다시 보자'는 말을 한 것뿐이다. 라일라가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에 '밥 먹었어?' 대신에 '요즘 잘 지내?'라는 말을 한다.


라일라와 차미화는 분명 한 사람인데, 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내 안에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 이름을 가지고 살았을 때 어땠나요?'라는 질문에 '별로'라는 대답을 했다. 정체성이 형성되어가는 그 어린 나이에 라일라와 차미화로 살았을 때 속으로 이런 질문을 많이 했다. 


'난 라일라인가? 아니면 차미화인가? 어느 쪽이 내 진짜 모습이지?'


두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흥미로운 성장배경이다. 하나의 이름이 아닌 두 이름으로 살았다는 흥미로운 성장배경을 갖게 되는 것이 장점이다. 단점은 자아 충돌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상태로 두 이름을 가지고 살면 자아와 성격이 분리되는 것 같은 경험을 얻을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본명인 라일라로 살고 있다. 차미화는 사라졌지만, 그 이름의 성격과 경험은 여전히 내 속에 있다. 따로따로 놀았던 차미화와 라일라가 하나가 되어 지금의 내가 나왔다고 보면 된다. 차미화와 라일라가 하나가 되는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다. 일상 속에 자신이 누구인지 자꾸 질문해야 하고 중간에 일어나는 자아 충돌을 참아야 했다. 그때 느꼈던 자아 충돌이 나만 겪는 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도 겪을 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 안에 두 사람이 '내가 이 사람의 진짜 모습이야!'를 외치면서 싸우는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꼈다는 것이다. 


두 이름으로 살다가 하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을 가진 친구가 다른 이름을 가지려고 했을 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하나의 이름 속에 하나의 자아가 깃든 것 같더라. 그러니 새로운 이름을 받을 때 조심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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