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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라 메이 Feb 16. 2022

0개 국어 0개 국적, 나는야 TCK

두 문화 사이에 놓인 나, 심리적인 국적이 없다.

"넌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그냥, 없는 것 같아."


내 국적은 필리핀, 장기적으로 지낸 국가는 한국이다. 그래서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어, 그럼 한국인 다 됐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틀린 말이 아니며 맞는 말도 아니다. 난 한국인 같은 외국인이지만 현지인 수준이 아니다. 고향도 마찬가지. 난 필리핀 현지인처럼 고향을 소개할 수 없고 모국어도 못한다. 필리핀 문화와 한국 문화 사이에 자랐지만, 그 어느 문화에서 현지인 수준으로 도달하지 못했다. 


나처럼 고향을 떠나 외국이 자란 사람을 Third Culture Kid(제3문화 아이들), 혹은 글로벌 노마드로 불린다. 제3문화 아이들은 두 명의 사회학자, Ruth Hill Useem과 John Useem이 만든 개념으로 부모의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 사는 아이들을 가리킨다. 제3문화 아이들, 영어로도 긴 개념이라서 TCK라고 줄여서 부르고 있다.



난 어릴 때부터 한국어, 영어, 그리고 모국어를 듣고 자랐다. 하루에 3개 국어 듣기. 장점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점도 있다. 그 단점이 내 뇌를 고생시킬 때가 많다. 


"우리 거기서 만날까? 그, 뭐지? 화장실인데, 그 머슈룸(mushroom)."

"너 지금 버섯 화장실을 말한 거지?"

"어! 맞아! 버섯!"


작년에 겪은 상황이었다.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버섯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친구는 내게 전화를 걸어 내 위치를 물어보자 나도 모르게 버섯이 아닌 mushroom을 떠올랐다. Mushroom이 한국어로 뭐였지? 뇌 속에 저장된 한국어 단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급한 나머지 '머슈룸'이라고 불렀다. 이와 비슷한 일을 자주 겪었다.


'Sunflower(선플라워) 영어로 뭐였더라?'

'저, 선플라워(해바라기)가 pretty(예쁘다)하네.'

'도마 위에 fish(생선)를 올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답답함을 느꼈다. 3개 국어에 노출되면 많이 듣는 단어가 우선순위가 된다. 예를 들어 책과 book(북) 사이에 일주일 동안 book보다 책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고 많이 내뱉으면 'Mom, where is my 책?'이 된다. 내가 버섯이 아닌 머슈룸이라고 말한 이유도 그렇다. 요리를 할 때 버섯을 쓸 때가 있는데, 집은 영어와 모국어가 존재하는 곳이기에 당연히 머슈룸이라고 불렀다. 습관적으로 버섯보다 머슈름을 불렀으니 당연히 머슈름이 강하게 떠오르고 버섯이라는 단어의 존재가 희미해졌다.


내 언어생활 때문에 0개 국어다. 3개 국어가 내 일상 속에 들어있어서 하나의 언어를 깊이 공부하기 힘들다. 한국어만 하면 영어가 약해지고 영어에 집중하면 일상 단어가 떠오르기 힘들 정도로 한국어가 약해진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언어 멀티플레이가 쉽지 않아서 제일 꺼리는 활동이 동시통역이다.



내가 지금 언급하는 국적은 심리적인 국적이다. 당당하게 '난 이 나라의 사람이야!'라고 말할 정도의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나라가 없다. 고향인 필리핀과 내 성장 배경인 한국을 좋아하지만 '여긴 정말로 내 집이다!'라는 느낌은 강하지 않다.


나와 필리핀은 여권으로 맺은 계약 관계처럼 느낀다. 필리핀에 태어났으니까 나는 필리핀 사람이다. 딱 그 정도. 물론 가족 덕분에 필리핀 문화를 배우고 자랐지만, 현지인만큼의 소속감이 아니다. 나와 한국은 학교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 같다. 비자라는 학생증을 가지고 대한민국이라는 학교에서 오랫동안 다니는 기분이다.


필리핀과 한국을 향한 복잡한 심경 때문에 스스로 0개 국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심리적으로 소속된 나라가 없다. 처음에 이러한 현실을 슬픈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속감 없는 외국인 딱지를 피하기 위해 한국 시민권을 발급해야 할지, 아니면 현지인으로 변할 때까지 필리핀에 정착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국 문화를 더 익혀서 시민권을 신청할까? 아니면 진정한 필리핀 사람이 되어서 그곳에 정착할까?'


한국 시민권을 가져서 진짜 한국인이 되거나 진정한 필리핀이 되려고 노력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늘 부러웠던 현지인의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소속감을 향한 과거의 집착을 보고 '왜 그렇게까지 노력했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집착의 원인은 그 한마디 때문에 생겼다.


"너 왜 모국어 못해?"


순수 호기심이었다면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불쾌한 표정을 짓고 '너 왜 모국어 못해?'라고 말하면 엄청난 상처가 된다. 이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서 '넌 모국어를 못하니까 문제가 많은 사람이야. 그렇게 살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실제로 모국어를 못해서 부모님까지 건드린 사람이 있었다.


"모국어를 못하다니, 지금까지 부모님이 뭐 하고 있었어!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필리핀 사람이면 당연히 필리핀어를 할 줄 알아야지. 이건 수치야!"


부모님 탓하는 말을 옆에서 듣는데 내가 마치 태어나면 안 된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 경험 때문에 결핍이 생겼다. 완전히 한국인이 되거나 진정한 필리핀이 되어야 그런 소리를 안 듣고 나답게 살 수 있음을 확신했다.


'기필코 소속감이라는 뿌리를 내고 말 테야.'


한국이든, 필리핀이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뿌리를 내겠다는 다짐을 했다. 


 


청소년 때 고향이 아닌 한국을 선택했다. 한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가 대학교 때 그만두었다. 시민권을 얻어도 외국인이라는 딱지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벗어날 수 없는 건가?'


그때부터 진정한 필리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고향을 자주 방문하면서 필리핀 문화를 익히고 모국어를 조금씩 배웠다. 이러한 내 태도 덕분에 고향에 있는 가족과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내 정체성은 바뀌지 않았다. 필리핀 문화 반, 한국 문화 반의 정체성은 그대로다. 


'필리핀 문화를 공부하면서 조금만 더 버틸까? 변화가 생길지도 몰라.'


이러한 마인드를 가지고 4년 동안 고향만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보내는 대학 생활을 필리핀으로 채웠다. 그렇게 살면 필리핀 현지인이 되지 않을까? 비로소 내 정체성이 완성되지 않을까? 고향에 정착할 생각까지 하면서 내 정체성을 필리핀 사람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씁쓸한 결과를 얻었다. 특정 문화와 가까워질수록 나 자신을 잃었다. 


진정한 필리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달렸지만 내가 얻은 건 방황이었다. 한국 시민권을 얻으려고 할 때 일시적으로 나타난 방황이기도 했다. 방황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를 잃어가면서 소속감을 얻는 게 좋은 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왜 소속감을 그토록 찾고 싶었지? 내게 모국어 못한다고 삿대질한 사람한테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스스로 만들어낸 질문을 천천히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누군가가 내 삶을 부정하면 내 자아를 부정하는 의미처럼 받아들였다.


'너 왜 모국어 못해? 필리핀 사람이면 당연히 모국어를 잘해야지!'

'아직도 한국 시민권 없어? 이 정도면 한국인이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반쪽짜리 자아를 가지고 사는 것 같다. 그래서 모국어를 잘하거나 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야 반쪽짜리 자아가 완성된 자아로 변할 줄 알았다. 소속감을 얻고 싶었던 나는 국적과 문화를 통해 소속감을 얻으려고 했다. 그리고 국적과 문화를 통해 내 자아, 내 정체성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자마자 방황의 시간을 끝냈다. 과거에 받은 상처를 치유하면서 미련을 놓기로 했다. 그리고 내 삶과 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다독였다. 


1년 동안 나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니까 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지금도 '왜 모국어 못해?'와 '왜 한국어 시민권 없어?'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과거처럼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지 않다. 먼 미래에 정말 필리핀에 정착하거나 한국 시민권을 얻는 날이 올 수 있다. 중요한 건 현재의 나는 이대로 행복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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