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꾸밈말 13
머리카락을 못 자르고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미용실에 갈 수 있다면 너무 좋겠지만 나에겐 아직 조금은 사치다. 새치 염색약을 사서 긴 머리 전체를 염색하고야 마는 나의 짠 기질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그렇게까지'라는 말을 내뱉도록 만든다. 내가 유난히 미용실에서 쓰는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엄마가 미용사이기 때문이 큰데 소녀의 마음을 알리 없이 칼 단발로 후려쳐버리는 엄마의 독단과 새로 산 고데기에 지져지는 희생양으로 딸을 선택하는 엄마의 단호함을 거쳐 완성된 애증의 역사 속에서 엄마는 스타일을 나는 돈을 굳혀왔기 때문이랄까.
곁눈으로 배운 미용 기술로 올해 9살이 된 아들의 머리카락도 두려움 없이 잘라내고 있는 요즘, 내가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물론 남편 때문은 아니다. 젊은 아이돌 여가수 혹은 여배우들의 짤들을 모아보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그 남자는 이미 남의 편이다. 시어머니 아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내가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게 된 것은 아들 때문이다. 아들은 내 머리카락을 유난히 좋아한다. 끝이 상한 내 머릿결에 풀이 죽어있을 때도 '아이 부드러워'라고 만지며 행복해하는 그 모습에 나도 행복해진다. 그럴 때면 괜히 비장한 마음으로 머릿결을 좋게 하는 영양제도 살피게 된다.
부드러워
아이가 어렸을 적, 유난히 부드러워서 보드랍다는 표현이 잘 어울렸던 아이의 피부가 떠오른다. 내 못난 손으로 만지면 혹여나 상처가 생기진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아이를 안고 닦고 부볐던 지난 날들. 평생 연습해 온 피아노와 그 고급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가리지 않고 해내야 했던 궂은일 덕에 내 손에 덕지덕지 붙은 굳은살이 그렇게 미울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속에서도 나를 웃게 했던 그 부드러움. 아들은 나도 그 부드러움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세상을 녹일 듯한 환한 웃음을 짓는다.
아마 당분간은 머리를 자르지 못할 것 같다.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내 몸뚱아리에서 부드러움을 찾아냈으니까. 상처가 흉터로 새겨지고, 얼굴의 주름이 깊어가는 동안에도 머리카락은 조금 더 부드럽게 버텨줄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바삭한 세상에서 나도 부드럽게 비빌곳 하나는 있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