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길이 먼 신입 대표의 이야기
‘미생’ 은 신입사원 시절 나를 다독이며 공감해주는 멘토같은 존재였다. 성취욕이 강한 내 성향을 잘 반영하는 스토리에 신입사원들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그때로부터 10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여운이 남아있다.
얼마전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미생 전권을 구매하고 그때 그 향수를 추억하고 싶어 다시 펼치게 되었다.
그때는 신입이었고 지금은 대표다.
사회생활 10년째, 직장인이 아닌 사업가의 시각에서 본 미생은 어떨까?
나는 그때 보다 얼마나 단단해 졌고 지금은 무엇을 느끼게 될까?
궁금했다.
승진이나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일자체의 멋과 맛에 취한 남자…
by 3권 오과장
오 과장, 나이 45세, 또래에 비해 승진도 늦고 성과가 보이는 쉬운 프로젝트는 뒷전, 남들이 하지 못하는 어려운 프로젝트는 자기가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정공법 상사맨이다. 무역의 의존도가 높고 고도 성장이 필요했던 시기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상이며 보상보다는 일의 의미를 찾는 진정한 프로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오과장보다 못한 대표가 되어 있었다.
일을 하다보면 그 일에 취해 푹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몰입’이라고 표현하는데 눈 앞의 이익보다는 일 자체에 심취해 재미와 속도가 붙는다. 야근을 해도 억울하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와도 일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는 집중의 순간이다. 그러다 계약이 성사되면 상사에게 보고하고 싶어 안달나는 경지.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나는 ‘몰입’ 보다는 회사의 ‘성장과 매출’ 에 집착하는 대표가 되었다. 눈앞에 성과가 보이는 일에 집중하고 일이 잘되면 당연한 것, 안되면 누구의 탓인지,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매달 손익을 따지는 철저한 결과중심주의 대표 였다.
그러다보니 못한것에 집착하게 되고 스스로 디테일한 실무까지 관여하며 숨막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변명을 하자면, 창업 5년 미만의 회사는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매출, 비용, 성장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나라도 너같은 상사는 싫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했다.
영업을 하다보면 실패할 수 있고, 계약 직전에 고객사의 사정으로도 백지화가 될 수 있고, 고객사와 밀당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는게 당연한데…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고 100% 완수해나가려는 집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의 뒤에는 일을 완벽하게 잘하거나 몰입하는 프로패셔널 마인드보다 매출과 성장에 목매는 계산적인 모습만 남아 있었고 프로젝트의 본질 보다는 ‘수익’ 중심의 사고 방식만 남아 있었다.
오 과장을 보니 내 모습은 굉장히 탐욕적이었다. 이제야 내 자신이 아주 조금 객관화가 된다. 수익에만 집착하지 않고 고객이 제대로 된 퀄리티의 서비스를 받고 있는지, 직원들이 프로젝트를 잘 이해하고 문제 없이 잘 수행하고 있는지, 회사 내부 시스템 중에서 업무의 효율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것들이 참 많은데 …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하지 말자.
‘회사는 그렇게 해야 수익이 난다’는 말… ‘성장을 위해 어쩔수 없었다’는 말…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사실은 내 방식대로 빠르게 도달하기 위해 어떤 잡음도 내지 말라는 독재적인 발언인거 안다. 이해와 설득이 아닌 내가 원하는 대로 더 편하고 쉽게 가기 위해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안다. 미안하다 나의 소중한 직원들…
모래성이 아닌 튼튼한 성을 만들자
성장에 집착하는 윗사람 밑에 빠르고 목표에 도달하는데에만 집중하는 실무자가 있는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과만 나오면 품질과 고객의 만족에 신경쓰지 않는 문화가 조성되는건 리더의 잘못이다. 그런데 난 왜 챙기지 않았느냐고 한번 더 거들었다.
내 탓이오
이런 회사는 단기적으로 수익을 빨리 낼수 있으나 장기적 생존은 보장할수 없다. 직장인이 었을때 결과에만 집착하는 임원들을 보면서 왜 저걸 보지 못하는지 답답했는데 그게 나의 모습일줄이야… 제발 장기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져야 겠다.
내가 욕했던 과거의 상사들.. 내가 그 위치에 가면 잘 할수 있을까? 생각했을때 그땐 잘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렵다는거 알겠더라. 맨날 일이 없어보이는 팀장, 애들만 갈구는 팀장, 타부서랑 친목 도모만 하는것 같은 팀장, 월급 루팡이라고 생각했건만 영업하고 직원들 관리하면서 큰 그림까지 그리느라 동분서주 한거였다.
대표가 된지 2년차, 갈길이 멀다.
더 많이 넘어지고 더 많이 성찰해야한다.
부족한 대표를 믿고 지각한번 없이 회사를 출근하는 직원, 눈으로 의견을 말하고 싶어하지만 일단 나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직원, 첫 인생 회사를 우리 회사로 결정해준 직원, 모두 고맙다.
더 성숙한 대표가 되어 다니고 싶은 회사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