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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의 힘 Feb 13. 2023

결코 가기 싫었던 지방 일반고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내 평생 한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토론해 본 적이 없다. 토론 대상자는 딸, 그리고 토론 주제는 딸의 '고등학교 선택'. 아내와 아들은 주로 청중 역할을 담당한다.


외국에서 중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은 고등학교 입학 전 한국에 돌아갈 예정으로, 조만간 고등학교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수는 총 2,373개. 그 유형에 따라 일반고, 특목고, 특성화고, 자율고, 기타학교 등 5가지로 분류된다(교육통계서비스).


소위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이 진학하는 외국어고, 국제고, 과학고는 예술·체육고, 마이스터고와 함께 특목고에 속하며 자율고는 자립형사립고와 자립형공립고로 나뉜다. 기타학교에는 딱 한 개 유형의 학교만 존재하는데 ‘그 밖의 또 다른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무려 영재학교가 기타학교로 분류된다.       


딸은 이 2,373개의 고등학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대략 10개월이 남은 시점이다. 우선 기타학교는 제외. 영재학교는 천연색을 띤 영롱한 빛의 무지개와 같아서 아무리 길게 손을 뻗어 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고자 하는 방향이 맞지 않은 특성화고도 제외하니 세 분류의 학교가 남는다.


하지만 시험을 거쳐서 입학하는 고등학교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선행은커녕 한국 중학교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입시 경쟁을 뚫을 자신이 없다. 딸도 나도 생각이 같다.       

  

그렇다고 가고 싶은 고등학교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특목고와 자율고를 포함한 모든 고등학교를 선택지에 올려놓는다. 딸은 제 몸에 맞는 옷을 고르듯이 이 학교, 저 학교를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본다.


그리고는 큰 고민 없이 세 후보군 중 하나를 탈락시킨다. 바로 일반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기타학교와 애초에 방향이 다른 특성화고를 제외하면 사실상 첫 제외다.        


딸의 말을 들어본다.     

“아빠, 난 자립형사립고나 국제고에 가고 싶어. 특히 용인외대부고에 가고 싶어. 거기 가면 1인 1악기도 하고 학교도 엄청 예쁘데. 이것 봐봐. 교복도 진짜 예뻐.”     


딸은 소위 ‘폼’ 나는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 용인외대부고는 전국 최고 수준의 명문 고등학교로 전국 최고 수준의 시설을 자랑한다. 물론 학비도 전국 최고 수준이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멋들이진 교정에서 예쁜 교복을 입고 평소에는 접하기도 쉽지 않은 악기도 연주하며 학교와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상상에 딸의 얼굴이 금세 상기된다.  


그다음으로 가고 싶은 학교는 인천국제고등학교. 집과 그리 멀지 않다는 점과 영어라는 강점을 살릴 수 있어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하다. 물론, ‘국제’라는 어감이 주는 묘한 자부심도 한몫했을 터. 이외에도 딸은 여러 명문 고등학교의 이름을 거론하며 본인이 왜 거기에 가야 하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하지만 웬지 허전하다. 뭔가 빠진 듯한 기분이다. 딸이 대학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관한 대화가 빠진 것이다. 지향점이 없으니 체인 빠진 자전거 바퀴처럼 대화가 헛돌기만 할 뿐이었다.      


딸에게 묻는다.     

“딸, 뭐가 되고 싶어?”


잠시 머뭇거리던 딸이 조심스레 답을 내놓는다.     

“나 사실 의사가 되고 싶어. 소아과 의사. 초등학교 때 봤던 ‘굿 닥터’에 나오는 여의사처럼 말이야.”  

   

의외다. 의사라니. 될 수만 있다면야 매우 행복하고 감사할 일이지만 의대에 가기도 그리고 가서도 힘든 길 아닌가.


미국에서 만난 30대 후반의 나이에 약대에 진학한 만학도를 보며 나는 내심 딸이 약대에 갔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물론 약대도 엄청 높아 보이기에 괜히 부담이 될까 딸에게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딸의 입에서 나온 단어인 의사, 그 꿈에 가까이 가기 위한 고등학교가 어디인지 즉각 자료조사에 돌입한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딸이 큰 고민 없이 버린 카드인 바로 지방의 일반고다.


수도권 의대 진학이 목표라면 그것이 답이 될 수 없지만, 어느 지역이던 의대진학이 목표라면 지방의 일반고야 말로 최적의 선택이다. 해당 지역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별도의 전형이 있기에 대부분의 경우 수능 최저학력 수준을 충족하면 바로 의대 진학이 가능하다.


물론 최저학력 기준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긴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부이긴 하지만 지역인재 전형에서 요구되는 최저학력 기준이 더 낮은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시 전형에서 최저학력 기준이 국, 영, 수, 과 중 상위 성적 3과목 합 4등급이라면, 지역인재 전형에서는 그보다 한 등급 더 낮은 3과목 합 5등급을 요구하는 식이다.


물론 학교에 따라 요구하는 최저학력 기준은 조금씩 상이하며 과학탐구를 1과목만 반영하는 곳도 아니면 두 과목 모두 반영하는 곳(이때도 평균 소수점 절사와 소수점 반영으로 나뉜다)도 있다.


딸에게 이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 지방의 일반고 진학을 권한다. 물론 그 지방은 아빠가 일하게 될 강원도가 될 것이다. 강원도 권역에는 의대 4곳에 치의대, 한의대, 약대가 각 1곳씩 있어 지역인재 전형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의대에 갈 성적이 되지 않더라도 여려 개의 차선이 준비된 셈이다.       


강원도에서 일하게 되면 좋은 점이 또 있다. 사실 이게 매우 크다. 딸과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여전히 어리디 어린 딸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방의 일반고 진학을 완강히 거부하던 딸은 반복된 대화 끝에 그것이 본인의 목표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구도 없고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강원도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결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웬지 일반고에는 소위 ‘센’ 친구들이 있을 것 같아 적응하기 쉽지 않을 거라 한다.


더군다나 한국의 친구들이 외국어고등학교, 과학고 등 특목고 준비에 한창이라는 소식에 딸의 심적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딸의 고등학교 선택과 관련한 토론이 시작된 지 두 달이 되었을 무렵,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일반고가 아닌 자립형사립고나 특목고 진학을 결정하면 당초 예정보다 몇 달 일찍 한국에 돌아가 입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딸,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제는 결정해야 할 거 같아.”     


잠시 침묵하던 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그러더니 울음을 터트리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빠, 나 진짜로 아빠랑 같이 살고 싶은데, 정말 싫어, 나 일반고 가기 정말 싫어!”     


아빠와 같이 살고 싶다는 말에 기쁨도 잠시, 결국 딸이 원하는 곳은 일반고가 아닌 수도권의 자립형사립고나 국제고다. 이렇게 울며 거부할 정도로 딸에게 있어 지방 일반고는 애초에 생각도 없었고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아빠로서 갈등이 생긴다. 두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다툰다.


'딸이 지방 일반고 진학을 완강히 반대하니 딸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나?'

'고등학교 입시가 최종 목표가 아니다. 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방 일반고보다 나은 선택이 없다.'


자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청하고 함께 진솔하게 대화하는 것은 부모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면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그것이 정말로 원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한 방식이 맞는지 여부를 고민하고 자녀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딸의 목표는 의약계열 대학의 진학, 더 구체적으로 의대 진학이다. 수도권 의대이던, 지방 의대이던 상관없다는 것이 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굳이 가족과 따로 떨어져 살면서 더군다나 높은 수업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수도권에 있는 학교에 진학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딸이 수도권의 자립형사립고나 특목고에서 상위권을 유지한다면 목표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중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딸이 선행으로 무장한 똑똑한 아이들과 경쟁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다.


지방 일반고에 진학해서 지역인재 전형으로 의대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인 선택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수도권 명문고+상위권 가능성 < 지방 일반고+최상위권 가능성'의 부등호가 성립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설명에 딸은 결국 아빠를 따라 강원도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용인외고, 인천국제고 등 멋들어진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강원도라는 낯선 지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진하게 남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부녀간의 치열했던 두 달간의 긴 토론이 막을 내렸다.



<부녀가 함께 지방에서 의치한 가기> 바로가기

https://brunch.co.kr/magazine/goingto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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