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이

by 남영은

서울 아이

남 영 은


1967년 5월, 초등학교

4학년인 나는 읍 단위에 있는 초등학교를 떠나 면 단위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아버지는 2학년인 동생과 나를 데리고 학교로 갔고 전입신고를 마쳤다. 마침 4학년 아이들은 2

부제의 오후반 수업이라 학교 뒤 펑퍼짐한 풀밭에 정렬하여 교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전학 온 아이가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그 아이는 금방 눈에 띄었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도시 아이였다. 시골 남자아이들은 하나같이 민머리에 책보를 등에 크로스로 둘러 묶는 차림이었는데, 그 아이는 상고머리에 사각모양의 두툼한 갈색가방을 메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전학 온 첫날부터, 찰진 서울말씨에 얼굴도 하얀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명의 새로운 인물이 한날한시에 순박한 시골 아이들 앞에 나타났으니 둘 다 관심의 대상인 건 확실한데, 그 아이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세련된 외모와 말투와 행동으로 전교생의 이목을 순식간에 끌게 된 것이다.


나는 지서 관사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사 바로 옆 참으로 낡은 초가에서 살고 있었다. 그 당시엔 추수가 끝나면, 초가지붕의 묵은 볏짚을 걷어내고 새 볏짚을 엮어 만든 이엉을 올렸었다. 그런데 그 집은 오랫동안 그 작업을 하지 않았는지 다른 집의 노란 지붕과는 대조되는 탈색된 회색 지붕을 하고 있어, 이는 어린 나에게도 왠지 안타까움을 자아냈었다.

그러나 그 낡고 초라한 초가와는 관계없이 그 아이는 꽤 똑똑하고 활달했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으며 특히 웅변을 잘하여 당시 도청소재지인 대전에 가서 상도 받아 오는, 그야말로 부족할 게 없는 완벽한 서울 아이였다.

그러나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서울에서 부모가 모두 경찰관이었는데, 아버지가 폐에 병을 얻어 돌아가시자 엄마와 외아들은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들어왔고,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친척집을 빌려 기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빠의 병이 엄마에게도 전염되어 엄마는 직장마저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전직 여경이자 멋쟁이인 그의 엄마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고 자연스레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2학기에 접어들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서울 아이에게 조금씩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둘 다 공부를 잘했고 그는 학급회장 나는 학급부회장으로 뽑혔다.

그런데 그에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횡포였다. 여자아이들에게는 유독 짓궂게 구는 것이었다.

고무줄놀이에 정신 팔려 있는 여자아이들 틈을 헤집고 들어와 연필깎이 칼로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졌다. 팽팽히 늘어난 고무줄이 끊어지면서 튕겨져 맨종아리를 때리면, 뻘건 줄이 새겨진 따가운 다리를 움켜잡고, 참으로 많은 여자아이들이 잉잉거리며 울곤 했다. 그뿐이랴. 밤톨만한 공깃돌을 모아 ‘많이공기’를 할 때면, 빙 둘러앉아 놀이에 열중하는 여자아이들 사이를 이번에도 그는 비집고 들어와 발로 공깃돌을 차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사방으로 튕겨진 공깃돌은 여자아이들의 얼굴이나 팔을 정통으로 맞추고, 아이들은 치마폭에 또 얼굴을 묻고 엉엉대며 울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놀고 있는 여자아이들 무리에 내가 끼어있으면 그 아이는 으레 하던 이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들은 곧 이 비밀스럽고 획기적인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자 점심시간마다 나를 경쟁하듯 선점하여 자기네 놀이 팀으로 끌어들였고, 이쪽과 저쪽 편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우대받을 수 있는 깍두기를 시켜주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나의 인기는 꽤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아이들 한 무리가 내게 떼로 몰려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의 난폭성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며 나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었다.

“걔는 회장이면서 그러면 쓰겄냐? 니가 부회장이잖남? 그러니께 더는 못 괴롭히게 니가 알어서 혀봐!”

나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여자아이들의 울분을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전달할지를 두고 또 어떻게 설득시켜 그를 바람직한 아이로 개선시킬 것인지를 두고,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밤잠을 설쳐야 했다.

한참의 고민 후에 드디어 나는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그렇다. 아무도 없을 때 ‘서울 깡패’라고 적은 쪽지를 그의 책상 속에 넣어두는 것이었다. 이걸 보며 서울 아이가 스스로 반성하기를 소망하는 나의 최선책이었다. 직면하거나 실명으로 적을 용기는 조금도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다음날이었다. 결국 그가 쪽지를 발견했고 내게 와서 다짜고짜 물었다.

“이것, 네가 써서 내 책상에 몰래 넣은 거지? 내가 깡패라고?”

“난 아녀, 아니랑께.”

나는 손사래를 쳤다. 잡아떼었다.

“그래? 이건 분명히 네 글씨야. 그런데 네가 안 썼단 말이야? 그렇다면 어린이회의 때 발표해서 범인을 잡아내겠어.”

일은 더 커졌다. 그의 말대로 회의 때 발표하게 되면 여자아이들은 내가 한 일임을 직감할 텐데, 그렇다면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 사실까지도 들통 날 판이었다.

드디어 다음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또다시 땀을 흘렸고 가슴도 뛰었다. 나는 왜 그 큰일을 저질러 잠자는 사자를 건드렸는지, 그 40분간은 얼마나 길고 두려운 시간이었는지.

아, 그러나 그는 범인을 찾고자 하는 안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더구나 ‘서울 깡패’라는 쪽지에 대해서도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나는 열 번도 넘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방과 후에 나는 그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야, 너 말여. 회의 때 왜 쪽지얘기 안 혔냐?”

“네가 넣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말 안 했어. 그리고 누가 썼는지 이젠 상관하지 않을 거야. 내가 여자아이들을 괴롭힌 건 사실이니까.”

와, 나는 이쯤에서 할 말을 잃었다. 정말이지 그 아이는 어느 누구의 범접도 불가한 ‘서울 아이’였다. 4학년밖에 안 된 어린이가 ‘증거’라는 그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다니! 저 정도의 논리적이고 수준 높은 언어 활용능력을 소유한 어린이는 전교생 중에는 단 한 명도 없을 터였다.

그때부터 나는, 나 같은 시골 여자아이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고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될 다른 세상 아이로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해야 했던 나로서는 미안한 일이긴 했으나, 어쨌든 그 이후로 그가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뚝 끊겼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여자아이들 틈에서 나는 더욱 당당해졌다.


환경미화심사를 며칠 앞둔 때였다. 우리는 방과 후에도 남아서 선생님을 도와 학급 게시판을 이리저리 꾸미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그 아이가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허리춤에 감췄던 무언가를 내놓더니 가지라는 말만 남기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것은 신기하고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색색으로 반짝이는 술 묶음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이런 물건을 내게 주다니, 이렇게 귀한 것을 어디서 구했을까? 역시 서울 아이는 다르구나. 지금 생각하면, 학교체육대회 때 사용하는 응원도구 같은 물건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난리가 나 있었다. 환경미화 장식품으로 사용하려고 옆 반 선생님이 도시에서 어렵게 구해온 오색의 술 뭉치가 송두리째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열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죽을 듯이 집으로 달려온 나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도록, 벽장 속의 더욱 깊숙한 구석에 그 귀중품을 숨겨야만 했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그의 행동을 되뇌었다. 그 아이는 왜 그걸 몰래까지 가져다가 내게 주었을까? 더구나 선생님의 물건이 아닌가? 왜 하필 나일까? 정말이지 왜 그랬을까?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걸 묻지 못했다. 그럴 용기가 없어서였다.


가을은 깊어갔다.

우리 교실 바로 뒷마당에서는 학교 언니가 늘 급식 빵을 쪄냈다. 가마솥 위의 나무 빵틀에서는 하얗고 뽀얀 김이 몽글몽글 올랐고 이 때문에 군침은 한없이 돌았다. 세상에 그것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었다.

우리는 격일로 점심식사 대용의 빵을 받았다. 옥수수로 만든 빵은 우리를 얼마나 달콤히 유혹했던가?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무너진 해미읍성을 넘어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가는데, 저만치에서 어떤 남자아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였다. 나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런데 웃옷 앞자락에서 조심스레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건네더니 쏜살같이 달아나버리는 것이었다. 신문지에 고이 싼 샛노란 급식빵이었다. 옥수수가루에 우유가 버물어져 만들어내는 구수한 향기와 겹겹의 신문지와 체온이 지켜낸 온기를 느끼는 순간, 그리고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또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나의 손끝에서는 경련이 일고 다리에서는 힘이 풀리고 있었다. 술 뭉치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나는 한참동안 정신을 잃은 듯 그곳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귀한 것을 왜 또 내게 주었을까? 그리로 지난다는 사실을 알고는 숨어 기다리면서까지 왜 내게 그것을 주었을까? 정말 왜 그랬을까?

그러나 나는 끝내 그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그럴 용기가 없어서였다.


5학년이 되었다.

나는 인근 지역에 있는 태안초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이사하는 것이 싫었고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더욱 싫었다.

이사하던 날, 이삿짐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생각했다. 짐도 다 실었으니 곧 트럭이 떠날 텐데, 혹시 그 아이가 점심시간을 틈타 나를 보러 오진 않을까? 지금 헤어지면 언제 볼 수 있을까? 잘 있으라는 말도 못했는데. 그러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 그런데 과연, 그가 저 멀리서부터 헐떡거리며 온 힘을 다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얼른 반쯤 열린 트럭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안녕……. 잘 가.”

창문 저쪽에서, 그가 서울 아이답게 세련된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볼 법하게 손까지 살래살래 흔드는 것이었다.

“잘 있으랑께.”

나는 시골 아이였다. 울컥대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작별인사였다. 나도 한번 손을 살래살래 흔들어보고 싶었으나, 서울 아이들이나 할 법한 그 간지러운 행동을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시간은 흘러갔고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나는 5학년 때 떠나온 그곳을 늘 그리워했다. 그리고 가끔 그를 생각했다. 그도 중학생일 테고 그 멋진 상고머리를 빡빡 밀었을 것이었다.

겨울방학이 되었다. 나는 엄마를 졸라 결국에는 허락을 받아냈다. 드디어 해미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와 친했던 윤숙이와 은숙이가 손님이 온 기념이라며 라면을 끓여주었다. 나는 그 아이의 집을 방문해 보자고 친구들을 졸랐다. 가슴이 뛰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 못한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여전히 초라한 초가 앞에 섰다. 그를 불렀고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는 놀라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방문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손만 비벼대는 것이었다. 중학생이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고 머리는 빡빡 깎은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었다. 이제 여학생과는 내외하기 시작하여 얼굴도 들지 못하는 그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나는 두 번째의 헤어짐을 가졌다.


아, 그 후로 세월은 정말이지 많이도 흘러갔고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다.

1981년 가을이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의 퇴직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고 나는 졸업 후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어느 날 퇴근을 해오니, 아직도 예의 그 시골에 살고 계시는 친척분이 와계셨다.

그런데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이름인가? 며칠 전 친척분이 해미읍성 앞길에서, 그곳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다시 올라가 살다가 마침 일이 있어 다니러 온, 어른이 된 ‘그 서울 아이’를 만났고 그가 나의 안부를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셨고, 그 아이는 내게 꼭 전화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정말 반가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며칠 동안이나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정말 많이 기다렸다. 어떻게 변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퇴근해 오면, 낮에 내게 걸려온 전화가 있었는지 일일이 챙겼다. 열흘쯤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너 4학년 때 옆집에 살던, 그 똑똑했던 남자아이 기억나지? 서울에서 이사 왔던 아이 말이야. 걔가 낮에 전화했더라.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학교 졸업 후 서울로 다시 올라와 지금은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에 다닌다고 하더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고향으로 내려오더니 엄마마저 잃어 고아가 되다니……. 지금은 친척들과의 연락도 거의 없고 혼자 살고 있다니 참 딱하게 되었어.”

“다른 얘기는 안 했어요? 제 안부는 안 물었어요?”

“아니, 다른 말은 안 했어. 뭔가를 말하려고는 하더라만, 머뭇거리다가 그냥 끊었어.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더라.”

그는 왜 나에 대해 묻지 않았을까? 왜 그 후로 다시 전화하지 않았을까? 한번쯤은 만나 봐도 좋지 않았을까?

급식빵도 주고 색색의 반짝이술도 주고 작별인사까지 주고받았는데, 그리고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를 가끔 생각했고 먼 길을 달려가기까지 했는데, 왜 그는 나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고 전화기를 내려놓았을까?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그걸 묻지 못했다.

그를 만나지 못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