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법행위와 그 수난사
남영은
1991년 8월 1일에, 나는 둘째 아이인 예쁜 딸을 당당히 출산했다.
‘출산은 여성의 권리이다. 아울러 출산에 관한 한 어떤 불이익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는, 저출산 역대 기록을 갈아치우며 인구 절벽을 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출산’에 관한 한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과 함께 더욱 강조되고 있는 사항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출산을 앞둔 임산부는 직장에서 출산휴가를 보장받는다. 이는 출산 전후의 산모의 건강과 자녀의 발육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제공하는 휴직 기간을 말한다. 현재, 직장여성은 출산 전후를 통하여 90일의 출산휴가를 받을 수 있다.
30여 년 전인, 나의 둘째 아이 출산 당시에는 예정일을 기준으로 전후의 일수를 적절히 배정하여 60일의 휴가를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방학 중의 출산이 문제였다. 방학 기간 중에 출산을 하게 되면, 방학 기간이 휴가 기간에 포함되어 묻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이는 출산이 임박한 여교사에게 못내 아쉽고 아까운 일이기에 때로는 큰 갈등을 유발시키곤 했다.
이런 상황에 맞물려 ‘염치없으나 암묵적인 비밀’이 하나 있었다. 방학 중에 출산을 할 경우에는 예정일을 개학일 즈음으로 늦추어 신고함으로써, 방학 연수일과 함께 휴가일 60일을 온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요즘 같은 전산화 시대에는 어림없는, 당시의 오프라인 시절에서나 간혹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당시 나는 의정부시의 한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출산 예정일인 8월 1일은 여름방학 기간 중이었고 개학일은 8월 26일이었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이 ‘염치없으나 암묵적인 비밀’을 요긴하게 이용하고자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예정일을 8월 20일쯤으로 늦추어 휴가신청서에 기재함으로써 그만큼의 기간을 더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60일에 20여 일을 더한 휴가를 마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담담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복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출산휴가를 사용한 2년 뒤인 1993년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때로 발생하는 이러한 암묵적 비밀의 위법성’에 대해 상부기관에 민원을 제기하는 일이 생겼다. 언젠가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조마조마한 사안인 것은 확실했으니 이때가 바로 그때가 된 것이다.
곧 공문이 내려왔다. 위법을 저지른 해당자들이 해당 지역의 교육지원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원이 제기된 해당연도나 전년도가 아닌, 두 해 전인 1991년의 해당자부터 소급하여 조사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1991년에 출산하지 않았던가. 아,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소위 말하여 ‘공권력에 의한 조사’라는 것을 받기 위해 조사관과 마주앉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도 법을 위반한 공직자의 신분으로 말이다.
나는 교육지원청으로 갔다. 그 자리에는 1991년에 출산하고 방학기간을 덤으로 사용하여 부당이득을 취한 몇 명의 여교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담당자가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였고 나는 출생일이 8월 1일로 기재된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해야만 했다.
얼마 후 해당교사 처분에 관한 공문이 왔다.
‘주의’라는 불이익 처분과 함께 면 지역 이하로 내신을 내라는 내용이었고, 1991년에 출산휴가를 받은 교사부터 소급하여 우선적으로 이 벌칙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암담했다. 면 지역이라니, 그곳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러나 뭐라 할 말이 있는가? 나는 법을 어기고 부당한 이득을 취한 위법인이 아닌가?
다음해인 1994년에 나는 먼 곳으로 전출하여 갔다. 포천군의 면 단위 지역에 있는 전체 6학급의 작은 학교였다. 학생들은 순수했고 교사들은 화목했다. 아,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결과로 인해 참으로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의기소침해졌고 힘든 상황에 처하고야 말았다.
당시 나는 중계동에서 살았다.
최단 시간의 출근 과정은 이러했다. 집 앞에서 택시를 타고 우선 녹천역으로 갔다. 이어서 녹천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의정부역으로 갔고, 의정부역에서 헐레벌떡거리며 한참을 뛰어 의정부시외버스터미널로 가야 했다. 그런 후에야 내촌행 시외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는 종점 바로 전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학교까지 또 걸어 들어갔다. 이로써 나의 출퇴근 조건은 왕복 네다섯 시간 이상이라는 새로운 막을 열게 된 것이다.
눈비 오는 날 택시를 못 잡아 안절부절못하던 일, 한 시간에 한 번 운행하는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면 그 놓친 버스가 얼마나 야속했던지. 난방이 안 된 시골버스 안은 또 얼마나 추웠던지. 그럴 때면 나는 시린 발을 녹이기 위해 신발을 벗고 버스의자 위에서 무릎 꿇는 자세로 앉아가야만 했다.
당시 첫째 아이는 초등 4학년이었다. 아침 시간에는 돌봐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은 전날에 교과서를 챙겨 가방을 싸고, 밤 10시쯤에 큰길 건너편에 사는 아이 이모 집으로 가서 거기에서 자고 등교하도록 했다.
둘째 아이는 30개월이었다. 딸을 챙기는 건 더 힘든 일이었다. 새벽부터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적어도 네 가지였다. 깨지 않게 옷 입히고 유모차 태우기, 이 작업은 상당한 기술을 요한다. 깨면 우니까. 기저귀 빨거나 개기, 화장하기, 내 도시락 싸기……. 물론 나의 아침식사는 생각도 못했거니와 먹는다 한들 목에 걸려 넘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출근하는 길에 아이 이모 집에 둘째 아이를 데려다 주었다. 어쩌다 깨면 숨이 넘어갈 듯이 울어 젖히는 어린것을 뒤로 하고,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택시를 타기 위해 달려야 했다. 근무지가 멀리 있었던 남편은 주말에나 집에 올 수 있었으므로 모든 일은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퇴근하여 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 밤 아홉 시였고, 집안일이라는 제2의 일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두 시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고 다음날 네 시에는 다시 일어나야 했다.
이런 일과가 시작된 후 처음 한 달 동안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울함에 의한 불면이었으리라. 소탐하여 대실한 나에게 민망했고 위법하여 처벌받는 자신에게 화가 났고, 민원을 제기한 그 누군가도 원망스러웠으며, 불이익 처분이 하필 1991년도에 출산한 교사에게 먼저 내려졌다는 것에도 의구심이 일었다.
그 사이에 황당한 일이 또 하나 있었다. 1992년과 1993년에 출산일을 변경하여 방학 기간을 덤으로 사용한 해당자에게는 불이익 처분을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위법 사안의 위중함이 ‘그다지 위중하지 않음’으로 탈색되었거나, ‘일벌백계’라는 말대로 한 번의 처벌로 백 번을 계도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 나의 소견이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직장을 그만두려 했고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표 내는 일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많은 분들의 만류 때문이었다.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부터는 이러한 근무 여건에 그럭저럭 묻혀 가게 되었고, 2년 후 나는 도시로 다시 나올 수 있었다. 지역점수 가산점을 받아 3년의 근무연수로.
그 후 20여 년이 흐른 2012년 봄이었다.
위의 그 학교 근처에 있는 수련원으로 학생을 인솔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시간을 내어 과거의 그 암담함 속에 있던 학교를 방문해 보고 싶어졌다. 교정의 나무들은 더 울창해져 있었고 건물은 더 깨끗해졌으며 학생들은 여전히 밝았다. 그 힘겨웠던 날들을 회상하며 나는 학교 구석구석을 한참 동안 거닐었다.
이 2년간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의 일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은 그때의 고난을 뒤로 하고 ‘현재의 나’라는 참으로 귀한 상급을 내려주었다. 시간의 풍요로움, 생각과 행동의 여유로움, 회상의 자유로움…….
아니! 상급에 덧입혀 체득한 교훈이 하나 더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의 법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된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준법의식은 참으로 중요하다.
-수필집 <우리의 사랑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