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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라도봄 Oct 03. 2024

수채화, 35년 전 나를 만나다

시작은 부러움이었다.

브런치스토리에서 내가 부러워하는 작가님들은 수없이 많다. 위트 넘치는 글을 쓰시는 분, 통찰력이 깊은 분, 표현력이 남다른 분, 글의 몰입도나 가독성이 좋은 분, 어마한 어휘력을 가지고 계신 분, 전문적인 지식이 남다른 분 등등. 홍디작가님(홍디의 브런치스토리 (brunch.co.kr))도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었다. 거의 매번 정말 작품 같은 수채화와 함께 글을 올리면 글도 글이지만 그림 덕에 모든 글이 작품처럼 느껴졌다. 특히 그 예쁘고 고운 수채화들은 나로선 닿을 수 없는 경지로 느껴지기도 했다. 김연아의 점프가 부럽다 해도 감히 흉내도 못 낼듯한 것처럼.  

홍디님 글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에 남긴 나의 부러움



그런데 그런 작가님이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원데이 클래스를 여신다기에 바로 신청을 했다. 김연아의 점프흉내는 부상이 되겠지만, 그림하나 망친다고 하루를 망치는 건 아니니까! 너무도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은 의심이 가득했다. 말이 '원데이'지 '2시간'인데 가능할까?  타고난 나의 정신승리력이 안되면 홍디작가님과 수다나 떨고 오자며 커져가는 의심과 걱정을 덮어주었다. 수업에 참여한 다른 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업의 견본인 작가님의 작품을 본 순간 작업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실물로 본 홍디님의 그림은 더 예쁘고 더 정교했으며 색감도 사진으로는 충분히 담기지 않는 것이었다. 신청을 고민하던 순간보다 더 막막해졌다. 홍디님의 따스한 배려에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수다끼는 싹 사라져 버렸다.


사실 이미 예전에 했던 원데이 클래스의 일반인들이 완성한 작품을 보았기에 막연히 나도 흉내는 낼 수 있겠지 했는데 아무리 봐도 흉내도 시늉도 무리다. 그럼 미다스의 손인 홍디님이 조금이라도 도와주시려나 했는데 '절대' 손대지 않으셨다. 곁에서 응원도 해주시고 도움이 되는 조언은 많이 해주시지만 절대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않으셨는데 그 뜻도 마지막에 깨달았다. 작가님의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35년 만에 다시 들어 본 붓으로 미숙하고 서투르지만 '내' 작품을 완성했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매우 묵직했다.



작가님이 예쁘게 짜서 잘 말려놓은 수채화 팔레트를 보며 그간 완전히 잊고 지냈던, 떠올리려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정말 딱 35년전즘이다. 초등학교 4, 5학년 즘 재능은 없지만 미술학원을 꽤 열심히 다녔다. 그림을 못 그리진 않았지만 잘 그린다고 하기에도 어딘가 늘 부족했다. 내가 정말 부러웠던 친구들은 재능을 타고나 미술을 전공할 만큼의 재주가 있는 아이들이 아닌 그냥 학급에서 잘 그렸단 칭찬을 듣고 자기만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지금도 연락이 닿는 엔지니어가 된 초등학교 때 남자사람친구는 미술학원도 안 다니는데도 나보다 훨씬 잘 그렸다.(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홍 씨다. 홍반장 잘 지내노?)  


열심히 노력해도 그게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미술학원을 다니며 기분 좋았던 기억이 많다. 잠자리가 그려진 4B 연필을 쥐고 열심히 데생을 하다 보면 꽤나 그럴듯한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다. 연필선이 보이지 않게 그리고 싶어 꽤나 손목스냅을 이리저리 써봤던 기억도 난다. '장비빨'이나 '도구빨'이란 말은 없던 시절이지만 좋은 도구를 손에 쥔 날을 기억한다. 80년대 후반 초등생용 수채화 물감, 붓, 팔레트는 매우 허접했다.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문방구에서 팔던 초등생용의 도구를 내려놓고 화방에서 질 좋은 물감과 붓을 사던 기쁨이은 어마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뻣뻣한 붓과 플라스틱 튜브에 들어있던, 오래 안쓰면 묽은 물이 먼저 나오는 물감 대신 브랜드는 잊었지만 엄청 부드럽고 탄성이 좋은 모에 단단한 검은색 대를 가진 붓과 알루미늄 튜브에 들어있는 포장도 고급진 물감을 사서 검은색 전문가용 팔레트에 짜서 말려두던 것까지. 완전히 잊고 지낸 35년 전의 설렘이 되살아 났다.

문방구 물감 VS 화방 물감



"맞다. 나 그림 잘 그리고 싶었던 어린이였지."


오전 두 시간의 수채화 클래스덕에 그간 불도 꺼지고 커튼도 쳐져 있던 기억 저장소 구석구석을 하루종일 뒤져 수채화 물감만큼이나 예쁘고 귀여운 어린 시절 추억을 찾아냈다. 정말 신기한 것이 수채화를 다시 그려보려는 이 수업을 신청할 때만 해도 전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팔레트를 보고, 붓을 들고, 이색 저색 섞어 보면서, 그리고 완성한 작품을 집에서 보고 또 보면서 붓을 사던 설렘부터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사생대회에 나가서 그 홍반장의 작품을 보고 질투하던 기억까지 많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35년 전의 나. 초등 5학년인 우리 둘째와 동갑이다.

35년 전의 나를 지금 만난다면 나는 그 아이가 분명히 '나'이지만, 익숙하기보다는 낯설듯 하다. 35년의 매일이 매달이 매년이 나를 수채화 물감처럼 그라데이션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내가 자라서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있지만, 매일 매달 매년의 경험이 나를 점점 바꾸어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색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다른 색이 되었을지언정 예전의 색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닌가 보다. 팔레트의 물감과 붓의 감촉이 흐릿한 기억에 색을 입혀주었다. 잊고 지낸 오래 전의 나를 만나고 온 기분. 한동안 이 여운이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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