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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식책 Aug 04. 2020

난 그거 새드엔딩이라 안 봐

팬텀싱어3 <흥타령>으로 보는 비극의 필요성

2020년 여름 재미있게 보았던 팬텀싱어 시즌3이 막을 내렸다. 여러 보석같은 무대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그동안 했던 무대 중 최고를 꼽자면 라비던스 팀이 부른 <흥타령>을 뽑을 것이다. 라비던스는 성악가, 뮤지컬 배우, 소리꾼 등으로 구성된 특별한 팀인 만큼 선곡 또한 팬텀싱어 시리즈 최초로 우리나라 남도 민요인 흥타령을 편곡하여 재해석했다. 무대는 7분 10초 동안 이어지는데, 비록 화려한 퍼포먼스가 없어도 무대를 보고 있자면 마치 훌륭한 클래식 비극영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https://youtu.be/4wPUa8OKbos


부질없다 부질없다 깨랴는 꿈 꿈을 꾸어서 무엇을 헐거나





후반부에 변주되어 몰아치는 곡의 짜임새와 사랑하는 님을 잃고 인생이 부질없다 말하는 가사를 따라 7분여를 감상하고 나면 모종의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지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귀로 짧은 비극 영화를 감상한 것이다. 이처럼 <흥타령>은 우리가 살면서 한번쯤 맞닥뜨려야만 하는 비극에 대해 깊고 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생을 살면 누구나 몇 차례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인생이 모두 비극이라는 비관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필멸자이며, 불완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어떤 비극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상상한 적 없는 사고, 운명의 잔혹한 덫 같은 것들 말이다. 혹자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며 떵떵거릴 수도 있지만 본인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 제아무리 장사라 하더라도 형언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낄 것이다. 오죽하면 진시황도 불로초를 찾아 눈물의 재력쇼를 부리지 않았던가. 남부러울 것 없는 악역들이 영생을 찾아 괜히 삽질하는 것이 아니다.


비극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의 신들이 고리짝을 짜던 시절까지 올라간다. 그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이라는 두꺼운 책을 통해 비극을 정의하고 평론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극들이 생산되고 평가받았겠는가? 약 28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을 쏟는 사람이라면 현실이 준비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법이다. 어쩌면 인류가 비극을 특별히 여기며 소비해온 것은 아마 우리가 실제 비극을 마주하기 전 치루는 시뮬레이션 훈련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내가 신의 노여움을 사 안 좋은 일만 연달아 생긴다면? 갑작스런 모종의 오해로 가족을 떠나 평생 방랑하게 된다면? 인간의 뇌는 겪어본 적 없는 사건을 상상하며 실제 물리적인 활동을 할 때만큼의 자극을 받는다. 시뮬레이션 효과다. 겪어본 적 없는 비극을 시뮬레이션 해 실제로 내게 일어났을 때 보다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게 하고, 내가 겪지 않더라도 타인의 비극에 공감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타인을 공감하게 하는 거울 뉴런이 초사회적 문명을 탄생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참고: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80403&cid=59550&categoryId=59550)


그러나 최근에는 비극이 대세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극은 잘 안 팔린다. 종종 주변 사람들이 웹툰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소비할 때 "그거 새드엔딩이라 안 봐." "너무 슬프다고 해서 시작 안 하려고." 라고 말한다. (나 또한 때때로 같은 이유로 소비하지 않는다) 굳이 픽션에서까지 슬프고 아픈 일을 보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현대인이 삶을 살며 목도하는 비극은 너무 다양하고 너무나 섬세하며 때론 악질적이다. 그러므로 대중 예술에서만큼은 밝고 행복한 것, 보다 희망차고 판타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복잡한 삶을 산다 해서 사랑하는 것이 없을 리가 없다. 그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을리도 없다.


그렇기에 다시 비극이 필요하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7분짜리 비극이면 충분하다. 나의 감정이 되살아나고, 나의 한계를 실감하며 어떻게 다시 현실로 돌아올 것인지 반추하게 만들면 된다. 그것이 좋은 비극이다. 좋은 예술 작품은 감상 후 공상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발 붙이게 만든다. 괜히 죄 없는 캐릭터를 죽이거나 사망 플래그를 여기저기 뿌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눈물을 유발하는 억지 감동코드는 양질의 문화생활로 눈이 높은 감상자들의 반발심만 일으킬 뿐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슬픔을 건드리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다'는 한 소절일 수도 있다. 그 한 소절이 내면을 건드리기까지 노래를 편곡하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들 간에 깊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창작자의 고뇌와 인생의 한 조각인 비극마저 수용하는 감상자의 열린 마음. 좋은 비극은 여기서 탄생하며, 이는 곧 조금 더 나아진 사회를 만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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