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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유 Sep 15. 2022

책에서 만난 아버지는 볼 때마다 새롭다

아버지 자서전을 리뉴얼하며 

1990년.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서전을 쓰셨다. 처음 그 책을 받아 들고 솔직히 난감했다. 너무 한자가 많아서였다. 당시 내 나이 20대 중반. 한자를 배운 세대이긴 했어도 절반이 한자인 아버지의 책을 읽기는 역부족이었다. 겨우겨우 통밥을 굴려가며 책을 다 읽긴 했지만 머릿속에 남는 내용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잡지사에 취직해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들면서 우연히 아버지의 책을 다시 보았다. 내 기억으로 그 책을 만드는 데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그런데 오자, 탈자가 수두룩했다. 책을 제대로 읽기가 힘들 정도로 기본적인 교정조차 되어 있지 않은 책을 보면서 돈만 받고 제대로 책을 만들어주지 않은 출판사에 화가 났고, 언젠가 아버지 책을 리뉴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려운 한자 다 한글로 바꾸고, 내용 구성도 좀 더 읽기 편하게 말이다. 

하지만 마음뿐, 리뉴얼은커녕 아버지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채 수십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아버지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우셨고 2015년 봄부터는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메르스가 한참 기승을 부린 6월에는 거의 의식을 잃고 하루하루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셨다. 그해 7월 2일 기어코 아버지는 세상과 영영 이별하셨다. 

아버지가 최후의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나는 종종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아버지 책을 필사하곤 했다. 50세가 넘어 다시 본 아버지 책은 감회가 남달랐고,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당시 나는 병 때문에 변한 아버지가 무척 낯설었다. 점잖고 강직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끊임없이 불편함을 호소하고, 걸핏하면 죽는 약을 구해오라는 아버지가 짜증 났다. 그런데 책을 필사하면서 원래, 아프기 전의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 책 리뉴얼 작업은 또다시 흐지부지 됐다.  


그렇게 하염없이 미뤄졌던 작업을 2022년에 다시 시작했다. 짬이 날 때마다 2015년에 필사해두었던 내용을 다시 보고, 훈화 내용을 새로 추가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 교직 생활, 엄마와의 결혼생활 등은 이미 다 알고 있던 내용인데, 또 새로웠다. 특히 아버지의 교직생활은 마치 한 편의 인간 승리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학교에서의 아버지는 마치 CEO와 같았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퇴직할 때까지 학교를 재건하거나 학교 환경을 정비하거나 학교를 증개축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늘 문제는 돈이었다. 턱없이 돈이 모자라면 아버지는 지역 유지들과 군부대, 때로는 학부모를 설득해 자금을 마련하고, 협조를 얻어 기어코 목표했던 것을 이뤄냈다. 

읽다 보면 나 같으면 아버지처럼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또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돈도 턱없이 부족한데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학교를 개선하려 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했다. 그것이 당신이 할 일이고, 가치 있게 사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입지와 노력’은 아버지가 늘 강조했던 우리 집 가훈이다. 자식들에게만 입지와 노력을 말하지 않고, 아버지는 학교에서 입지와 노력을 했다. 뜻을 세우고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걸 아버지 스스로 멋지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아버지의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다른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 책을 리뉴얼하는 동안 많이 행복했다. 비록 한자 투성이에, 썩 재미있게 잘 쓴 책은 아니어도 아버지가 자서전을 남겼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만약 책이 없었다면 불완전한 기억으로만 아버지를 만나고, 그 기억조차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 아버지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결국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테니까.. 

아버지 책 표지. 제목은 아버지가 직접 붓으로 썼다. 

아버지의 책을 리뉴얼하면서 우리 모두 각자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책 한 권쯤은 남겨두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죽으면 깔끔하게 잊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그리울 때 내가 남긴 기록과 흔적을 보면서 나를 기억해 준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버지 책은 지금 디자인 편집 중이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누구나 보기 편한 책으로 만들고 싶다. 디자인이 다 완성되면 디지털 인쇄소에서 30권 정도만 찍어 가족들에게 보낼 생각이다. 


엄마 책도 만들고 싶었는데, 너무 늦게 시작했다. 직접 쓰시지는 못하겠다고 해서 내가 인터뷰를 한 다음 원고를 대필할 생각이었는데, 딱 한 번 인터뷰하고 많이 아프셔서 미완으로 끝나 아쉽다.  


아버지 자서전 본문. 이 정도면 그래도 한자가 적은 페이지에 속한다. 책에 배어있는 세월의 흔적마저 정겨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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